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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새 Feb 14. 2024

 결혼, 그리고 이별

  1

" 합천군 삼가면에 사는 참한 샥시입니다요."

 중매쟁이 박씨는 달덩이같이 보얀 얼굴에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단정하게 생긴 처자의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흑백사진 속의 색시는 아래 위 검정 비로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귀티나는 얼굴이었다.

 "이만하면 보기 드문 미인입죠."

 김처사는 말없이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 보았다.

 "내 나중에 전갈하리다."

 박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나왔다.

 벌써 몇 번째인가. 진주에서 꽤 내로라 하는 여관이라 먹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으니 여기 저기 중매가 들기는 하는데, 왜 그리 신중한지 선뜻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 처사의 태도가 영 알 수 없다.

 '진주 출신은 안 되네.'

 '먹고 살 만한 집안이어야 하네.'

 '인상이 좋아야 하고.'

 며느리감을 까다롭게 고르는 거야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여러 번 퇴짜를 맞고 나니 김이 샐 지경이다. 그래도 부잣집에 중매 성가가 되면 짭잘한 수고비는 맡아놓은 당상이니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

 김처사의 둘째 아들은 인물 좋기로 소문난 데다가 일본 유학생이다. 와세다 대학은 일본 내지인들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곳인데 그 대학을 다니고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진주 내에서도 딸자식 가진 사람들이 많이 탐을 낼 법도 한데 진주 출신은 안 된다니.

 그래도 이번에는 예감이 좋았다. 사진 속의 처자가 꽤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합천이면 진주에서 그리 가깝지 않은 편인데다가 사는 형편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하니 그럭저럭 까다롭기 짝이 없는 김처사의 눈에도 들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며칠 지나지 않아 김처사에게서 연통이 왔다. 박씨는 한걸음에 삼가까지 달려가 김처자의 집에 이 사실을 알리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전통 혼례식이 그러하듯 장대동 집안팎이 떠들썩하게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소문난 부잣집인 만큼 잔치 음식도 넉넉히 장만하여 동네 잔치로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맛난 음식보다 훤출한 신랑과 달덩이같이 훤한 색시의 모습이  더 동네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너도 나도 흥겨워하는 잔칫날, 김처사의 마음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2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복녀는 그저 할말을 잃었다.

 일본에 색시가 있다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잠깐 들어오라고 해서 왔는데 혼례를 올리라고 하셨구먼. 어른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내게는 일본에 정혼자가 있다오. 미안하오."

 인물 있고 부잣집이라고 좋은 곳에 시집가게 되어서 좋겠다고 친구들과 동생들이 그렇게 부러워 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참으려 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잘 생긴 신랑의 얼굴이 뿌연 눈물 사이로 실루엣처럼 멀어져 보인다. 며칠 동안 쏟아붓듯 사랑한 행위는 그럼 미안함에서 비롯된 봉사였던가. 세상에 좋은 것은 다 가진 것 같던 꿈같은 시간들이 다 한낮 일장춘몽이었다니. 정말로 신랑은 잘 생기고 예절 바르고 다정하기까지 했는데. 앞으로 살아갈 세월들이 행복에 겨울 것 같아서 손등을 꼬집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는데.

 새며느리가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보고 김처사는 둘을 불러 앉혀놓고 다짐을 했다.

 "내 생에 일본 며느리는 인정할 수없으니 그리 알아라. 네 조강지처는 새댁이니라. 일본 가거든 그 사람은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오도록 해라."

 병문은 아버지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사실 그럴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와세다 대학은 올해 졸업반이니 학위만 따면 조선에 들어와서도 대접받고 잘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길로 떠난 병문은 10년 동안 돌아오지않았다. 긴 이별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3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당시 병문은 겨우 19살이었다. 잘 생기고 예의 바른 병문을 눈여겨 본 하숙집 주인 미야꼬는 병문을 아들처럼 따습게 대해  주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재혼한 새어머니는 자식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형이나 병문에게 따뜻한 정을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문은 저도 모르게 친어머니처럼 미야꼬를 좋아했다. 더구나 타국에서 외로움에 가슴이 시리도록 아플 때 그 빈 자리를 알게 모르게 채워준 사람이다.

 사실 일찍 일본으로 유학을 온 이유도 어머니의 부재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둘째이기 때문에 가업을 물려받을 의무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활은 넉넉했으나 딱히 민족주의나 독립 운동 같은 의식 있는 집안은 아니었으니  일본 유학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하숙비나 생활비는 넉넉하게 보내었으니 어려움을 모르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었다. 병문은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에 다녔다.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조선 사람이 일제 시대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경제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학생들이 그렇듯 일제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 대학의 강의를 소화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진주 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가 아닌가.

  미야꼬는 조용조용 걷고 말도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없는 듯 하지만 늘 함께 하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병문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식사나 청소 등에 다른 하숙생보다 더 신경을 썼다. 조선 사람이지만 아까웠다. 일본 사람이라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을 텐데. 아들이 없는 미야꼬는 해가 갈수록 병문의 사람됨됨이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뜻밖이었다. 아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야꼬가 병문을 좋아한 것처럼 딸 하루나가 병문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 한 이유는 병문에 대한 미야꼬의 욕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짐짓 눈치를 채고도 둘 사이를 눈감아 주었다.

 외동딸 하루나는 미야꼬 부부의 사는 목적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자식은 그렇게 키운 만큼 주장도 강하고 독립심이 강했다. 막는다고 그만 둘 성격이 아닌 줄 알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야꼬 본인의 마음이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짝을 지어 내보내야 하지만 계속 끼고 살고 싶은 마음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인물이 다가 아니지만 병문은 눈에 띄는 미남형인데다가 예의바른 청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 병문이 참 괜찮은 젊은이인데. 잘 생기고 머리도 좋고. 일본인이 아닌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떠보는 듯 미야꼬에게 던지는 남편의 말에 미야꼬는 조용한 웃음으로 긍정의 뜻을 표현했다.

 "하루나와 서로 호감을 가진 모양이던데. 귀화를 하면 일본인으로 인정받으면서 잘 살 수 있을 거야. 와세다 대학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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