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자령에서 복수초를 만났다

선자령 산행기

by 세온

선자령 가본 지가 2년이나 되었다. 여름은 여름대로 생각보다 시원해서 좋았고, 겨울은 겨울대로 눈 많이 내린 날 멋진 설경 보러 바로 달려가곤 했는데, 꽤 오래 못 간 것 같다.
이번 겨울에 눈 많이 내리면 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았고, 큰 눈 온 날은 초등 2학년 손녀 돌보미 하느라 갈 수가 없었다.
제일 빨리 핀다는 순천 금둔사 매화 본 뒤로, 아직 피크인 꽃 소식이 없어서 망설이던 중, 강원도를 제외한 전국에 미세먼지 나쁨이 예고되어서 강원도로 발길을 돌려 오랜만에 선자령을 가기로 했다. 남편이 예전에 기관지 관련 큰 병을 앓은 적 있어 미세 먼지에 민감한 편이다.
아침 출발 6시 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횡계 나들목으로 나와 대관령 마을 휴게소 도착이 9시다. 교통이 좋아 부담이 적다.
대관령 마을은 바람이 세고, 겨울도 길기로 유명하다. 사실은 봄을 맞이하러 온 게 아니라 꽃 여행 틈새에 한 박자 쉬고, 다시 봄을 찾아 나설 참이었다.
선자령은 늘 하늘이 좋았다. 등산로도 별로 험하지 않아 트레킹 수준이고, 올라가면 우리가 '바람의 언덕'이라고 애칭을 붙인 너른 초지에서 시원하게 뚫린 하늘을 감상하는 것. 그 즐거움 때문에 우리는 선자령을 간다.
이번 출발은 국사성황사 주차장이다. 국사성황사는 대관령 서낭신인 범일 국사를 모시는 곳으로, 강릉단오제에 국사성황제를 지낸다고 한다.

선자령 등산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대관령 옛길, 강릉 바우길. 이번에 가서 보니 올림픽 트래킹(올림픽 아리바우길 ) 안내판도 있었다. 그만큼 걷기길로 선호하는 곳이라는 뜻이리라. 대관령 국가 숲길이 선자령 트레킹 코스의 정식 명칭인 모양이다. 대관령 숲길 안내판에는 소나무 코스(대관령 자연휴양림 방향), 구름 코스(능경봉, 고루포기산 방향), 옛길 코스(대관령 치유의 숲), 그리고 목장 코스(국사성황사, 선자령 정상)로 나누어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목장 코스 총 17.15km 중에서 9km 정도 걸을 예정이다.

전에는 국사성황사에서 올라가는 길이 경사가 급해서 조금 힘들었는데, 데크 계단을 설치하여 편하였다. 등산로 정비를 많이 한 것 같다. 이정표도 목장 코스 캐릭터인 양 그림을 넣어 예쁘게 만들었다.

산죽의 파릇파릇함이 주변 경치를 덜 삭막하게 만든다. 정겨운 돌계단을 올라가면 KT 송신소까지 연결된 포장도로를 만난다. 대관령 마을 휴게소에서 오면 1.3km인 것을 0.2km를 단숨에 올라왔다. 한 1.1km쯤 단축한 것 같다.

대관령 숲길이다. 숲을 보려면 대관령으로 오면 된다. 숲에 오면 숨만 쉬어도 건강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겨울인데도 숲을 느낄 수 있는 건 대관령 에 많이 자라고 있는 침엽수 덕분인 것 같다. 주목을 비롯하여 소나무, 전나무, 구상나무, 종비나무 등의 군락지가 한겨울에도 초록의 빛을 선사해준다.

늘 그냥 지나쳐 다니던 길을 자세히 살피면서 걷게 된 것은 블로그 산행기를 올리고 난 후부터 달라진 나의 모습이다. 사진도 풍경과 인물(나는 주로 모델이다.)을 같이 찍던 것이 풍경을 더 많이 찍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다.

종비나무는 그렇게 만났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종비나무는 구상나무와 많이 비슷하게 생겼다. 구상나무는 동글동글한 맛이 있는데, 종비나무는 좀 더 가늘고 뾰족해 보인다. 사실 구상나무, 전나무, 분비나무 등은 잘 구별을 못하겠다.
항공 무선 표지소 옆으로 난 길을 지나면 참나무 숲을 만난다. 지금은 잎이 없어서 삭막하다. 잎이 없어야 눈에 띄는 재미난 가지가 있어 찍어본다. 우리는 그저 재미있다고 하지만 저런 모양으로 자라게 된 아픈 사연이 있겠지.

종비나무

새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니엄 해를 기념하여 식수했다는 주목이 있다. 한 그루인 줄 알았더니 1000명이 천년수인 주목 1000그루를 심어 기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하는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고 바쁘게 길만 걸었던 예전 일을 반성한다. 그때 심은 나무들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기 바라는 마음이다.

새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조금 달라졌다. 좀 가파른 편인 기존의 등산로는 막고, 좀 더 편안한 길을 만들었다. 길 끝에 참나무 기둥을 받쳐 만든 벤치가 정답다. 쓰러진 나무를 재활용한 센스가 돋보인다.

새봉 전망대에 도착하여 강릉 쪽의 전망을 살폈으나 구름 많음이다. 쾌청한 날씨에는 강릉 시내가 훤히 보이는 곳인데, 아마 밤에 예보된 비구름이 조금씩 밀려오는 중인가 보다. 새봉에서 대관령과 선자령이 각각 2.5km. 거리가 같다. 딱 중간 지점인 셈이다.

산 곳곳에 간벌의 흔적이 보인다. 빽빽한 숲은 간벌을 하여 나무의 자람을 좋게 하고, 빈 땅은 묘목을 심어 미래의 숲을 계획하고. 대관령 숲을 건강하게 관리하느라 애쓰는 평창 국유림관리소 직원분들께 감사하다.

등산로 입구에서 만난 흰 무늬의 멋진 나무 이름이 궁금했는데 바로 물푸레나무였다. 물에 가지를 집어넣으면 그 물이 파랗게 변한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단다. 튼튼하고 무거우며 나뭇결이 아름다워 가구재로도 인기가 있으며, 농기구 자루나 도리깨의 회초리 등으로 시용한다. 나무껍질은 한약재로도 사용하는 아주 유용한 나무다. 대관령 국가 숲길 중 옛길 코스에 물푸레나무 군락지가 있는 것을 보니 대관령에 이 나무가 꽤 많이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물푸레나무 군락

드디어 탁 트인 언덕에 도착했다. 구름이 좀 있긴 하지만 푸른 하늘이 우리를 반긴다. 어서 가 보아야겠다.
그런데 갑자기 발길을 멈춘다. 꽃이 피면 알 수 있지만 나뭇가지만 봐서는 구별하기 힘든 진달래와 철쭉 이름표다. 진달래는 꽃눈이 2,3개가 함께 붙어있고, 철쭉은 가지마다 눈이 하나씩 있다. 철쭉은 작년에 피었던 꽃의 씨방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걸로 구별하기도 한다. 대관령은 꽃이 좀 늦게 필 것 같은데, 4월이나 5월쯤 한번 와서 확인을 해 봐야겠다. 오래된 나무가 많아서 진달래든 철쭉이든 활짝 피면 장관일 것 같다. 4-6월이면 핀다는 야광나무도 그때 오면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빈 땅에 빼곡히 심어놓은 주목 묘목들이 보인다. 그 나무들이 바람 많은 선자령에서 별 탈 없이 자라 숲을 이루기를 소망해 본다.

드디어 반구가 모두 하늘인 언덕에 올라선다. 이 모습을 보려고 선자령을 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한 바퀴 돌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늘이 나를 포근히 끌어안는 기분이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고민이 다 별게 아니다. 하늘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절로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멀리 보이는 하얀 풍력발전기들은 하늘을 더 멋지게 해 주는 액세서리다.

바람이 세어서 풍력발전기를 세웠을 것이다. 그 센 바람에 적응하여 사느라 나무들도 풍력발전기처럼 한쪽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풍력발전기는 역시 대관령이다. 언덕에 우뚝 선 모습이 과학적 기기가 아닌 상징물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미 선자령과 한 몸으로 어우러진 풍경이 된 지 오래다.

들판은 마른 풀색이지만, 계절이 조금만 지나면 초록으로 변신할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못 지어도 마음 한가득 푸르름으로 채울 수 있는 곳이다. 푸르지 않아도 드넓은 들판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풍경이다. 우리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난가 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등산객 부부가 꼼짝도 않고 한참을 앉아 있다. 들판 멍~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드디어 정상. 정상석이 이만큼 큰 산이 없을 것 같다. 인증 사진을 찍고 뒤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자리 옆에 버들개지가 피어있다. 봄이 오긴 온 모양이다.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올라온 방향과 반대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약간 경사가 있지만 그리 길지 않아서 걸을 만하다.내려오면 넓은 도로와 만난다. 하늘목장으로 가는 길이다. 하늘목장 입구에 풍력발전기 아래 언덕의 한그루 나무는 언제 와도 여전하다.

대관령은 아직 겨울이 맞다. 하지만 눈 사이로 졸졸 냇물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눈에 덮인 하얀 얼음과 녹아 흐르는 시냇물이 반복된다.

등산로에 구멍이 뚫려있다. 무너져 내린 구멍이 제법 크다. 두더지 구멍은 아닌데, 무슨 일인가 봤더니 땅속에 얼음이 보인다. 겨우내 눈이 겹겹이 얼어있다가 녹으면서 땅이 무너진 모양이다. 잘못 디뎠다가는 푹 빠져버릴까 봐 조심한다. 꺼진 부분은 등산객들이 밟아서 빠졌던 흔적인가 보다.

자작나무와 낙엽송이 함께 있는 숲을 지나고, 샘터도 지나고, 잣나무 숲도 지나고, 산림 습원을 만난다. 숲길을 걷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아니다, 대관령은 봄이 맞다. 사람들이 엎드려 있기에 뭐하나 했더니 복수초가 잔뜩 피어있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복수초를 보긴 했지만, 자생 복수초 군락을 보다니. 반가운 마음에 휴대폰으로 이쪽저쪽 마구 찍어댔다. 밟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서. 간간이 보이던 속새도 푸르름이 더 짙어진 채 우리를 반긴다. 길이 녹아 질척거려 3월 특유의 진창길에 신발이 빠진다.

3월12일 (306).JPG
속새

재궁골 삼거리에서 약간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대관령 영웅의 숲과 탄생숲을 지나면 우리의 일정도 끝이 난다. 뜻밖에 주차장에서 버들개지 핀 것을 또 만난다.

우수 경칩이 지났다. 대관령도 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