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캘리그라피로 하려고 마음먹고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밀리의 서재에서 다운받아 두었다.
그런데, 캘리그라피 책을 필사할 때와 경우가 다르다. 캘라그라피 책은 저자가 쓴 글을 따라 쓰기만 하면 되지만, 시집은 인쇄된 글자체를 캘리그라피 글씨체로 바꿔 써야 한다. 내 실력이 그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하루 한 장 캘리그라피(김리을)>를 우선 옮겨 써 보기로 했다.
저자마다 좋아하는 글씨체가 있는 것 같다. 종이책 워크북 2권, 전자책으로 2권을 따라 써 봤는데, 딱히 정해진 글자체는 없어 보인다.
대면 수업으로 배우면 체계적으로 훈련이 되겠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현장 체험 학습의 사전 답사 같은 심정으로 연습 중이다.
짧은 글을 예술성을 가미하여 그림 그리듯 작품을 완성하거나, 시나 좋은 글귀를 예쁜 글씨체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요즘은 가게 상호에도, 행사 플래카드에도, 책 제목에도 캘라그라피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 글씨가 보이면 자세히 살피게 된다.
내가 옮겨 쓴 글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명대사라고 한다. 영화는 보고 감명을 받았지만, 이 명대사가 어느 부분에 나오는지 기억은 안 난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명대사를 집어내는 것을 보면 감탄을 한다. 내가 본 것인데도 기억을 잘 못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대사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이야기의 내용에 폭 빠져 보느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캘라그라피 책에 나오는 글귀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거나, 생각하게 하는 만드는 내용이 많다. 그런 말들을 골라내는 센스에 나는 그냥 숟가락 대신 손가락만 움직여 그 맛에 빠져든다.
어린 시절 처음 맛 본 밀크 초콜릿, 예쁜 여배우가 광고에 나와 유명해진 초콜릿, 외국에서 사 왔다고 선물로 준 초콜릿 상자에서 맛 본 술맛 나는 초콜릿.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한 때 열심히 사 먹던 다크 초콜릿. 아,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닙스까지. 초콜릿 맛에 대한 추억이 만만치 않다.
초콜릿을 선택하는 것처럼 인생에서의 선택이 쉬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나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는 아무래도 부모의 선택이 아이의 환경을 좌우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우선 학교 선택부터, 직업 선택, 배우자 선택 등등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과제들이 생기게 된다.
길은 늘 두 갈래에서 망설임의 기회를 준다. 이 길로 갈까, 아니면 저쪽 길로 갈까. 가 보지 않은 길이라 알 수가 없다. 부모님이나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결국 선택은 본인 몫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할 시점에 나는 큰 모험을 했다. 가정 형편상 2년 제이던 교육대 진학을 종용받고 있을 때,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당시 예비고사에 선택하기로 되어있는 지역을 부산과 서울로 바꿔버렸다.
친구들이 예비고사 지망 지역을 바꿔야겠다고 의논하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부모님과 상의 없이 담임을 찾아가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담임은 왜 부모님과 상의했냐는 묻지 않고, 후회 안 하겠냐는 질문만 한 건지.
"저 J 교대 못 가요."
당돌했던 딸의 통보에 어머니는 얼마나 또 놀라셨을까. 다음날 학교로 찾아갔지만, 그날이 서류가 넘겨지는 날이라 되돌릴 수가 없다고 했단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대학 시험 떨어지라고 빌었다는데, 설마 딸 시험 떨어지라고 했을까 싶지는 않다.
어쨌든 서울로 들어 올려진 내 인생은 그대로 40년 세월을 서울에 묻혀 살았고, 그 뒤로도 여러 선택의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의 내 자리까지 오게 만든 선택을 한 셈이다.
지금 내 인생의 맛은 어떤 초콜릿 같은 맛일까. 내가 만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또 한 번의 선택은 일본 행을 포기해버린 일이다. 서울이나 부산으로 대학을 가려고 한 이유도 야간대학 일어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의 비극이라고 할까. 일제강점기 당시 할아버지는 일본에 있는 유명 대학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하숙집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일본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할아버지를 할머니와 결혼을 시키신 것이다. 중혼이었다.
할아버지는 결혼할 때 한번, 10년 후에 또 한 번 다녀가신 후 일본에서 일가를 이루고 사셨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 연통이 없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할아버지 얼굴 한 번 못 보고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은 꽤 거창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없었지만 일본의 가족들과 우리 가족을 잇는 다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일어과를 졸업한 후 전여옥님 같은 특파원 상활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박경리님의 '토지' 같은 성격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남편의 프러포즈가 '일본 안 가면 안 되겠냐.'였으니까, 그 어렵고 험난한 운명의 선택에서 스스로 피해버린 셈이다. 그때 일본 행을 고집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능력이 그렇게 될 만큼 문재가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야간대 일어과를 졸업했어도 그쪽으로 진출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냥 꾸어본 꿈이다.
캘리그래피 글을 옮기다가 옛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써 본다.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의 결과. 용감한 자가 길을 개척하는 법이다. 나는 용감하기에 겁이 났다.
그 뒤로 일본 가족들과는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듯하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집 앞 어귀에 줄지어 놓인 백여 개쯤 되어 보이는 장례 화환 사진과, 우리 부부 결혼식 때 뜬금없이 참석한 일본 할머니와 삼촌 기억만 내게 남기고, 아버지 형제 분마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더 볼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