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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새 Jul 12. 2022

진주성을 가다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는 내게 중요한 곳이다. 나의 마음속 깊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 내 고향이다.

 진주에서 18년을 살았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떠나온 고향은 그대로 고향으로 마음속 깊숙한 곳에 담아놓고, 그곳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2배는 더 서울에 파묻혀 살았다.

 왜 그렇게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는지, 고향을 떠나 살면 뭐가 얼마나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선택은 내 몫이었고, 나는 그 선택의 책임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진주를 잘 가지 않게 되고, 가더라도 명절날 오빠네 집에 잠깐 머무는 정도였다. 다른 집과 달리 남매간의 사이가 돈독한 편이 아니다 보니, 미국 살던 딸이 한국으로 오면서 추석 때면 하던 고향 걸음을 그나마도 하지 않게 되었다. 진주는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 '고향'이란 폴더에 저장! 되었다.

 우연히 이웃 블로그 사진작가님이 연이어 올리는 진주성 사진을 보고, 그만 내 마음속 빗장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진주성을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바로 달려갔다. 간 김에 연락만 하고 만나지 못했던 오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도 잡았다. 그 친구는 나와 달리 평생을 진주를 떠나지 않고 산 친구다.

 덕유산 산행을 끝내고 산청 동의보감 휴양림에 짐을 푼 다음, 가벼운 차림으로 진주성을 찾은 것은 오후 2시경. 진주를 가더라도 오빠네 집에만 들렀지 진주성은 잘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진주성 한 바퀴가 목적이었다.

 


  

진주 사투리 중에서 참 예쁜 말이 있는데, 그것이 '에나'라는 말이다. 진짜, 정말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진주 사람들만 쓰는 사투리라 해서, 처음 서울에 살 때만 해도 '에나'라는 말만 들으면 반가워서 진주 사람이냐고 인사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진주 에나길은 진주 공북문 - 진주 중앙시장 - 비봉산 - 선학산 - 진양교- 진주성을 잇는 15km, 5시간 이 소요되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조성이 되어있었다.

  이번에는 진주성에 집중하기로 했다. 출발은 진주 공북문. 옛 진주성 지도에 있는 성문을 2002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진주성이 만들어진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고려 말에 석성으로 쌓았다고 전해진다.

 진주성이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 때문이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겨우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마음을 합쳐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큰 승리였다.

 그러나 다음 해 10만 대군을 끌고 온 왜군에게 7만여 명의 민, 관, 군이 처절히 유린을 당한 아픔이 있는 역사다. 그래서 성안에 들어서면 먼저 마음이 아프다. 그분들의 애국, 충절이 곳곳에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 있는 그곳에서 나는 자랐다.

  성곽의 둘레는 모두 1,760m라고 하니, 천천히 다녀도 두 시간 정도면 되지 싶어서 친구와의 약속 시간은 넉넉하게 5시쯤으로 잡았다.

  성곽 옆으로 빨간 배롱나무가 붉은 깃발과 잘 어울린다. 배롱나무는 아버지의 추억이 있는 나무라,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이 나무를 백일홍 나무라고 하셨다.  

 "백일 동안 피어서 백일홍 나무라고 하는 거야."

 그 말씀이 어제 들은 듯 생생하다.

 관람료는 일반 1인 2,000원이나 우리는 면제 대상이라 그냥 들어갔다. 면제 대상이 많았다. 진주 시민은 물론이고, 특히 한복 착용자는 무료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관람료 할인도 있으니, 대상이 되는지 잘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김시민 장군 동상
만화로 본 진주대첩 이야기

 민가로 빽빽했을 성 안은 파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가운데 우물 하나가 예전에 민가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 우물인데, 복원 사업 중에 발굴되어 복원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관군과 백성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성 왼쪽으로 먼저 돌기로 했다. 촉석루를 먼저 가고 싶어서였다. 진주성 관리사업소 벽면에도 진주성과 관련된 자료들이 붙어있었다.

김시민 전공비

 진주성의 역사만큼이나 무게 있는 고목이다. 수령이 200년을 훌쩍 넘은 나무들이 많았다.

 진주성 바깥에 넓은 공터가 보였다. 뉴스에서 잠시 들었던 진주 외성 발굴 현장인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졌다가 100년 만에 모습이 드러난 진주 외성의 길이만 100m 넘게 거의 원형이 드러날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고 하니, 참 반가운 소식이다.

 진주교 오른쪽으로 많은 건물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건물들과 도로 아래에 역사의 유적이 온전히 파묻혀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지나다녔나 보다.

호국 종각

 진주교의 모습이 보인다. 남강에서 멀지 않은 본성동에서 3살까지 살았다는데, 진양호 다목적댐이 생기기 전에는 홍수가 잦은 편이었다. 물난리가 나고 나면 진주교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떠내려오는 가축이나 집, 큰 물건들을 구경하기도 했던가보다. 오빠랑 같이 나왔다가 오빠가 동생 잃어버렸다고 울면서 집으로 혼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정작 나는 아무런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혼자 집을 잘 찾아갔던 모양이다.

 촉석문을 복원한 것이 1972년이라고 한다. 내가 30대 시절 진주성을 찾았던 그때 촉석문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변영로 시인의 '논개'는 고교 시절 열심히 외었던 시다. 손가락마다 열개의 반지를 끼고, 왜장의 허리를 꽉 껴안은 채 남강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의기 논개를 노래한 시비가 촉석문 앞에 있었다.

 아! 촉석루.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잘도 놀러 다녔던 여름 피서 장소다.

 촉석루가 한국전쟁(1950.6.25) 당시 전소되지 않았다면 보물이 아니라 국보가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국보 제276호였다고 한다. 1960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는 기록에 맞추어보면, 내가 할머니를 따라다니던 때가 중건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나 보다.

 여름에 다른 곳은 아무리 더워도 촉석루는 늘 강바람으로 시원하였다. 너른 촉석루 마루에 할머니들이 자리를 깔고 화투를 치면서 피서를 하곤 했는데, 사 남매 키우기가 버거워 할머니 손에 맡겨지다시피 한 어린 나를 할머니는 곧잘 데리고 다니셨다.

 어김없이 시원한 마루에 돗자리는 깔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늘 앉으시던 지정석을 찾아, 그곳에 잠시 서서 할머니 생각을 했다.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에 누각의 이름을 '촉석'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는데, 내가 아는 또 다른 이름은 '남장대'이다. 촉석루 안쪽에 남장대라고 쓴 편액이 있었다.

 의기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를 찾았다. 왜장과 함께 남강 물에 뛰어든 때의 나이가 겨우 19살이라고 한다.

 석류꽃이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석류나무

 남강에 유람선이 있었다. 지붕이 있는 판옥선 형태인데, 총 3km, 왕복 30분 코스라고 한다. 평일에는 8회, 주말에는 10회 운항한다고 안내에 나와있었다. 김시민 장군의 이름을 따서 '김시민호'라고 명명하였다.

 남강 저쪽을 '배건네'라고 불렀는데, 배건네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진주를 상징하는 '하모 인형'이란다. 성안 카페 앞에도 하모 인형으로 만든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모'도 '에나'처럼 진주와 관련지어지는 사투리다. 다른 곳에서도 하모란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 정말. 맞다.'란 뜻으로 두루 쓰이는 말이다. 긍정의 뜻이니 캐릭터 인형의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의암이다. 어릴 때 듣기로는 의암이 좀 떨어져 있어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설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현재 모습으로 꽤 가깝기는 해도 바로 넘어가기에는 위험한 곳이다. 바위 옆에는 '의암'이라는 글씨가 한자로 새겨져있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광장이 있고, 개천예술제 등 큰 행사에 공연을 하던 무대가 있었다. 그 왼쪽에는 열심히 다니던 시립도서관이, 좀 더 높은 곳에는 진주에서 가장 높아 보이던 시설물이던 송신탑과 방송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전했겠지. 송신탑 옆에서 토끼풀 꽃으로 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놀던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마침 진주성 옛 모습 사진전을 하고 있었다.

 성 안에 있던 민가. 내가 클 때는 초가집은 없었다.

 옛날에는 촉석루 축제도 한 모양이다.(1930년대 사진)

 옛날에는 진주교가 없었나 보다. 배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1915년 사진)

 조선 시대 기생은 평양 기생과 진주 기생을 알아준다고 했단다. 왼쪽은 1890년대 사진이니, 당시 진주 교방에 속해 있던 실제 기생의 모습인가 보다.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을사 5적으로 유명한 이지용의 첩이 되기를 당당히 거부한 산홍의 인물화이다.

 눈에 익은 모습이다. 중고교 시절 등교할 때 자주 지나다녔던 북장대로 보인다. 집이 서장대 바로 아래에 있던 나는 아침에 서장대로 올라와 성벽 길을 걸어서 북장대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서 학교로 가곤 했다.

 아이들을 위한 귀여운 조형물도 보였다. 걷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전기차도 운행을 하고 있었다. 저희들끼리 진주성 체험학습을 하러 나온 것인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갔다. 제법 물통이랑 간편복으로 많이 걸을 준비를 하고 나온 모습이다. 한창 물놀이에나 바쁠 아이들이 더운 여름에 진주성 탐방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였다.

 그런데, 촉석루 누각 위만 시원한 게 아니라 걷는 내내 더운 줄을 모르고 걸었다. 강바람이 성벽 위까지 올라오고, 탁 트인 잔디밭 공간과 오래된 큰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그늘까지. 여름에도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조선시대 사용하던 천자, 지자, 현자총통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하모 느린 우체통

 성 안에는 음료와 간식을 파는 카페가 두 군데 있었다. 카페 지붕을 감싸듯 서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인상적이었다. 가을이 되면 얼마나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낼 것인지 상상 만으로도 즐거웠다. 가을의 진주성 단풍이 아주 멋지다던데, 다음에는 가을에 한번 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뒤의 은행나무

 개천예술제는 해마다 11월이면 있었던 진주의 큰 축제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합창대회, 합주대회 등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음악, 미술, 문예, 무용 등의 대회를 포함한 다채로운 행사가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큰 무 만한 고구마라던지, 10kg 수박의 몇 배나 됨직한 커다란 호박을 구경한 일이었다. 아마, 농산물 경연대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가장행렬이 있어서 남고 아이들의 여장을 재미나게 구경하기도 했고, 학교나 단체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유등놀이도 재미나게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유등축제는 이제 12월 겨울 축제로 바뀐 모양이다. 진주에 살 때는 겨울에도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기억이 없는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어쨌든 남강이 얼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릴 때는 천수교가 없었다. '배건네'가 빤히 보이는 곳이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진주교를 건너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1980년대에 방문했을 때 생경하게 느껴졌던 성벽도 이제는 세월의 더께가 입혀졌나 보다. 세월이 가면 이렇게 연륜이 쌓인 모습으로 어우러지는 걸, 그때는 '요새 사람들의 솜씨가 역력한'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한탄을 했을까. 옛 조상들의 정이 밴 자연스러운 돌무더기 성곽을 내가 꽤 사랑했던 모양이다.

 진주 호국사와 서장대. 그때 절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자료를 찾아보니 진주성을 보수, 정비하는 과정에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호국사를 새로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주 호국사
호국사 일주문 전경
서장대

 진주성은 촉석문 - 촉석루 - 서장대 - 북장대 - 공북문 - 촉석문까지 한 바퀴를 빙 두르는 성곽의 형태로 되어있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처럼 도로 때문에 끊어진 성벽이 아니라 완전체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으로 출발하든 왼쪽으로 출발하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서장대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통로다, 이 아래쪽 동네에 우리 집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냥 산길이었다.

 창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김시민 장군을 비롯하여,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창렬사 입구

세월이 조금은 입혀진 성벽의 모습이다.

 포루는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로,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12좌의 포루가 진주성 내, 외성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뿌리는 다른데, 한 나무처럼 자라는 연리나무인 진주성 사랑나무의 모습. 팽나무와 느릅나무의 만남이다.

 어린 시절 6년을 보낸 초등학교(국민학교) 운동장에 큰 포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그 나무에서 떨어지는 까만 열매가 달콤하여 주워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포구나무가 팽나무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비슷한 나무만 보면 팽나무가 아닌가 유심히 찾아보곤 했었다. 진주성 곳곳에 팽나무가 정말 많이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친구의 문자가 우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오데고."

통역하자면 '어디야?'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3시간을 훌쩍 넘겼다. 길 아래쪽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보이는데, 아직 영남포정사도 못 보고, 북장대도 못 보았는데, 마음이 바빠진다.

박물관 앞 진주 조형물

 운주헌(선화당)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근무하던 관청이라고 한다. 아직 복원이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청계서원
경절사

 영남포정사는 지금 보수 중이었다. 어린 시절에 놀던 그 자리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영남포정사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보수가 끝나면 다시 카메라를 들고 진주를 방문해야겠다.

 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남포정사는 진주목 시대에 진주 내성의 관문이었으며,  고종 시대에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 걸었고,  1925년 도청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뭔가 서운했다. 친구와의 만남에 마음이 급하여 안쪽 깊숙이 있는 건물이 궁금하였지만 미처 가보지 못하고 내려온 것이 탈이었다. 북장대를 못 보고 내려온 것이다.

 새로 올린 듯한 나무 기둥 색깔이 그저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전망대를 하나 만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친구한테 물어보니 북장대가 맞단다.

 친구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먼발치서 사진만 찍고 말았다. 변했어도, 새로 보수를 했어도 내 마음속에 큰 의미로 자리한 북장대를 보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다시 걸음을 해야겠다.

북장대



*진주성 리플릿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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