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동고분군과 대가야 역사테마파크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변한의 12개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 세운 연맹 왕국이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등 여섯 나라가 있었다.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었으며, 가야의 문화는 신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한국사 사전 3)
6개의 나라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구지봉 설화와 관련이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구지봉에 300여 명의 백성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6명의 귀공자로 변하여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야의 시작을 1세기인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년)으로 보는 근거가 된 것 같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건국설화나 고대 가요 등이 한자를 이용한 향찰과 이두의 형태를 빌어 기록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가 선사시대인 셈인데, 그 선사시대의 중심에 가야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6가야 중 가장 늦게까지 존재한 나라가 대가야이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로 알고 있던 금관가야는 그보다 30년 전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에 존재하였던 가야는 확고한 고대국가로 자리매김한 고구려, 신라, 백제 이전의 국가다. 그러나 562년까지 엄연히 존재하였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77년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견하게 되면서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령은 다른 곳과 다른 특별한 여행지라는 느낌이다.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박물관, 도로 하나 건너에 위치한 역사테마공원과, 악성 우륵박물관이 지척에 있어서 하나의 관광 타운 같은 느낌이 든다. 진주에서 태어난 내가 늘 진주성과 논개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자란 것처럼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대가야에 대한 마음이 늘 함께 했을 것 같다.
방문 일은 2022년 8월 10일이다. 한여름이라 걱정했지만 날씨가 흐려서 생각보다 많이 덥지는 않았다.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와 대가야 박물관 주차장 사이에 넓은 도로가 있다. 주차비와 입장료는 무료였다. 역사테마관광지 안에 있는 물놀이장은 3,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리플릿에는 레일썰매장과 VR 체험관, 전기차 등의 안내가 있었지만, 우리는 걷기 여행이 위주였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륵지라는 이름의 연못에 시원하게 분수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연잎만 가득한 우륵지에 연꽃은 얼마 없었다. 철이 지났나 보다.
가야는 철의 나라다. 제철이나 제강 기술이 뛰어나 철로 만든 갑옷이나 무기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 상징적인 철갑옷으로 무장한 병사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입구를 들어서면 가야 시대의 집 모형과 생활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 보인다.
기마 병사의 형상이 재미있다.
대가야시네마는 일반 영화와 독립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작은 영화관이다.
VR 체험관도 있다. 가야의 생활상, 가야 역사 이야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모양이다.
여러 가지 고대 가옥 모형과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름철 아이들에게 인기인 물놀이장이다.
19~20세기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가마를 재현한 것인데, 연결계단식가마라고 한다.
미로 공원이 있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고령 대가야둘레길은 총 5코스와 번외 코스인 수목원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1코스 왕국길과 2코스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길의 일부를 걷기로 했다.
철기방의 모습이다.
대가야에는 구지봉의 설화와 다른 또 하나의 건국신화가 있다. 바로 정견모주에 관한 설화인데,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라는 여신과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들은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김해로 가서 김수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고령에서는 30년 전까지도 정월 보름날 정견모주의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건국 초에 두드러진 세력이었던 금관가야보다, 5세기 이후 대가야가 가야 문화권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하면서 전승되기 시작한 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로 보여진다고 해석되고 있다.
도로를 건너면 대가야 박물관이다. 우리는 대가야둘레길 1코스 왕국길인 고분군 산책로를 먼저 걷기로 했다.
맨 처음 만난 73, 74호 고분이다.
더운 여름에 고분군을 산책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 했는데,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람이 적은 데다가, 전망이 확 트여서 오히려 걷기에 좋았다. 날씨가 흐려서 햇빛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준비해 온 양산을 쓰고 다녔다
예전에 TV에서 경주 고분의 잔디 깎기와 잡초 제거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내용을 찾아보니, 남녀 70명이 40여 일을 일해야 경주 일대의 고분과 유적지 손질을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이곳 지산동 고분군도 그런 수고로움으로 깔끔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무는 별로 없었겠지만 풀이 무성한 작은 언덕들이 모여있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시대 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처음 보고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1906년 일본인이 처음 연구를 시작했고, 우리나라가 제대로 발굴 조사를 시작한 것은 1977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가야 고분의 특징은 순장이다.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순장이 있었다고 하지만 소규모였고, 가야의 경우 최대 40여 명을 순장(44호 고분)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지산동에만 크고 작은 고분이 700 여기 정도가 있는데, 대형 고분만 75호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져서 관리되고 있다. (사적 제79호)
지산동 고분군의 특징은 고분이 산 중턱이나 편평한 곳이 아니라, 산 정상의 능선 부근을 따라 만들었다는 것이다. 높은 곳이 하늘과 맞닿은 신성한 장소라는 당시 가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는 해석이다. 죽어서도 자신이 살아온 고장을 내려다보고 싶은 것이었을까.
길이 있으면 더 가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만 내려가려고 하다가 언덕까지만 가 보기로 했다.
언덕의 끝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 벤치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적당한 나무 그늘 아래, 사방으로 트인 언덕이라 시원한 바람이 쉼 없이 불어주었다.
참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1,500여 년 전에는 삶의 한가운데서 온갖 고민과 애욕에 흔들리는 일생을 살았다 치더라도 지금은 커다란 고분의 둥근 윤곽과 부피만 남긴 채 고인들은 말이 없기 때문일까.
그들이 이 고분들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야를 그저 먼 옛날의 설화나 전설로 치부하고, 그 존재마저 의심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사후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의 철석같은 종교적인 믿음으로 온갖 보물과 집기를 묻고 크게 봉분을 만들어서 후대의 눈에 띄게 만든 것이 역사적으로 도움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순장된 생매장의 목숨들이 안타깝지만 그땐 그랬단다.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계세 사상에서, 이승에서의 생활을 그대로 누리라고 부하와 몸종을 같이 묻었다고 한다. 자진해서 묻히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순장을 했다는 것은 사람도 부장품이나 마찬가지로 취급을 한 것이라 한다. 위세가 클수록 더 많은 사람을, 계급이 내려갈수록 인원을 줄여서 순장을 했다고 한다.
이왕 올라온 김에 1호 고분까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1호 고분은 산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1호 고분 옆으로는 주산성까지 가는 대가야둘레길 안내판이 있었다.
밤에는 조명을 켜서 빛을 따라 걷는 길을 조성해 둔 모양이다.
되돌아가는 길. 언제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쉽게 오기 힘든 곳이라, 쉽게 경험하기 힘든 길이라, 더 소중한 느낌이 드는 걷기길이다.
이곳을 사랑하고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고령을 생각하고, 지산동 고분군 왕국길을 생각하게 되면, 커다란 나무 아래 두 개의 벤치가 있는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야인들의 삶을 생각했던 추억을 떠올릴 것 같다.
커다란 나무와, 시원한 그늘과, 다른 곳에서 만나기 힘든 낯설은 풍경이, "괜찮다. 다 괜찮다. 우리도 이렇게 1,500년 세월을 지나오지 않았느냐.'하고 위로할 것만 같다.
고민하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사후를 궁리하지 말고, 그냥 살아. 지금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까.
대가야 전시관에는 그들이 고분에 함께 묻어둔 갖가지 부장품들이 공기 중에 나와서 우리에게 선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다고. 바로 이게 그 증거야.
고령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출토된 유물이 설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양전리에는 구석기 유물뿐이 아니라, 암각화(바위그림)까지 발견되었다.
가야 시대의 유물들이다.
부엌에서 쓰는 도구에는 과일 씨앗, 닭 뼈 등의 음식물의 흔적도 남아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왕릉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대가야 박물관 입장료가 2,000원인데, 표를 한 번 끊으면 왕릉박물관 관람도 함께 할 수 있다.
어린이 체험 학습관이 있었다. 토기 캐릭터 만들기, 인쇄, 탁본, 복식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왕릉박물관은 지산동 고분 44호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왕이 묻힌 큰 돌방과 껴묻거리(부장품)를 넣을 딸린 돌방, 순장자들을 묻을 돌덧널로 이루어져 있다.
화면으로 복색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대가야의 왕과 왕비의 모습을 꾸며 놓았다. 사후에도 이렇게 살고 싶었을까. 몸종과 병사들도 모두 순장의 대상이었을 테지.
5월이면 대가야와 관련된 체험축제가 있는 모양이다. 다양한 체험과 공연, 행사가 있다니까,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관심을 가져볼 만할 것 같다.
6.7km, 3시간 10분. 제법 걸었지만 피곤한 줄 몰랐을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1,500년을 거슬러, 가야인들의 생활과 생각을 엿보고, 그 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직접 보면서 어느새 명상의 시간이라도 가지게 된 걸까. 산과 꽃길을 다니면서 열심히 걷고, 경치를 담고, 꽃을 찍을 때와는 다른, 내 마음속에 생각의 결을 가지런히 정리한 듯한 차분함이 느껴진 하루였다.
그들은 분명히 있었다.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하며, 사랑하고 다툼도 하며, 때로는 고민을 하고, 두려워도 하고, 사후를 도모하며, 그래서 만든 찬란한 문화를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