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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의 집은 어디일까』

by 연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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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시집, 『미안하다는 말의 집은 어디일까』를 달아실 시선으로 발간했다.


김경주 시인이 발문과 표4를 시간을 들여 살뜰히 써 주셨고, 달아실 박제영 대표님의 손길을 담아 아버님, 엄마, 세월호 사건, 이태원사건~의 아픔들이 집을지었다. 오랜 시간 사랑을 담아 잉태를 하고 아프게 출산을 한

이 시집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며, 사랑으로 흘러가기를 바래본다.


달아실 박제영 대표님의 블로그 글을 옮겨본다.


시집 속의 시들을 읽다보면 시 속에서 움직이던 말들이 조금씩 흔들리며 제자리를 찾으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말, 목적지에 닿지 못한 말, 머뭇거리는 말들 말이다.

시인 김경주는 발문에서 이를 두고 “시인의 단어들은 말더듬을 한다. 시인은 말을 더듬고 있다. 이곳의 말과 저곳의 말 사이를 오가며 말을 더듬는다.”라고 썼다.

이 말더듬은 모자람이나 서툼이 아니라, 말이 감당해야 할 마음의 무게를 옮겨 올 때 생기는 잠깐의 멈춤 혹은 망설임과 가까울지 모른다.

연명지 시인은 이런 멈춤이나 망설임들을 고쳐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은 흔들리는 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그가 마련해둔 자리 같은 것이리라.

그는 말이 처음 생겨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안정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은 이미 완성된 ‘언어의 도구’가 아니라, 세상에 겨우 도착한 생명체 같다.


말의 좁은 산도産道를 지나가요 조심스럽게

초원을 뛰어다니던 목소리들이 담장을 넘고 남 이야기하듯 가볍게

말을 좋아한 사람들이 말을 모아 집을 짓고

출산을 했다고 축하를 받아요


읽는 사람의 심장을 다치게 하는 살아 있는 말들이 좋다고, 말은 당근을 먹으며 오물거려요

엄마 손을 놓친 불안전한 말들이 쌓여가는 식탁에서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의 말을 발라먹고 있어요

가시가 눈을 찌르기도 해요


빛바랜 사진 속에 웅크린 문장을 만나면 슬픔은 먼지처럼 날아가요

우기에 젖어 있던 지난날을 스윽 열고 들어와 이마를 짚어주는 문장이 나를 살게 해요

말이 잘 자라도록 정성을 다해 물을 주고

가만가만 쓸어주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고요

일상과 나의 몽상 사이에서 즐겁게 거닐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시집 갈피마다 지문들이

울컥울컥, 고여 있어요 버려진 시집들

잊힌 것들을 다시 부르는 밤이 제일 무서워요

머릿속에 가끔 에러 창이 뜨는 날은 허리를 비틀며 나아갔어요


시집 속에 잠시 앉아 있다 일어나면 말들이 장난치듯 새벽을 만나는 날이 있어요

시집을 벗어난 새들은 모두 고아가 되지요

― 「시집 고아원」 전문


이 시에서 말은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산도를 지나 막 태어난 존재처럼 움직인다.

식탁 위에서 서로 뒤섞이거나 상처를 남기는 장면 역시, 말이 마음이나 쉽게 방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조용히 건드린다.

그는 이런 불안정함을 고쳐 써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아직 자리를 정하지 못한 상태 자체를 시의 결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마지막 구절 “시집을 벗어난 새들은 모두 고아가 되지요”라는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 말들을 연민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말에게도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떠올리게 한다.

흔들리는 말일수록 마음 둘 곳이 필요하고, 시는 그 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 흔들림을 숨기지 않고, 말이 고아가 되지 않도록 시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해두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는 말보다 감정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감정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말이 도착하곤 한다.


어떤 봄은 용기를 내서 울어야 사용할 수 있다

가라앉은 손들이 울컥 게워놓은

슬픔마저 빠져나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들

껴안았던 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미안하다는 말이 돌아오는 봄

기일에 만난 우리들 말 속으로 말아 올려지는


두고 와서 미안해

― 「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부분


너는 이제 여기에 없는 이름

하늘과 땅이라는 간극에서 우리의 마음은 골절되었다

검은 리본 아래

무심한 듯 해맑게 웃고 있구나

― 「이명」 부분


말의 흔들림은 감정의 밀도에서 생긴다. 그는 감정을 우선시하는 대신, “두고 와서 미안해”라는 말이 뒤늦게 오듯, 말의 지연을 허용한다. 그는 그런 시간을 받아들이며 봄은 용기를 내서 울어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는 공기처럼 비어 있고 말은 그 빈자리에 가 닿지 못하고 흔들린다. 웃는 얼굴이라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더 큰 부재를 만든다. 그는 이 빈자리를 서둘러 채우지 않고 말의 중심이 사라질 때 생기는 흔들림까지 시의 한 부분으로 남긴다.


그렇다. “입술을 벗어나 허공에 떨어져도 도착하지 않을 말/ 미안하다는 말의 집은 어디일까(「미안하다는 말의 집은 어디일까요」)”라는 물음처럼, 그는 어떤 말이든 도착할 수 있는 곳, 흔들리는 말까지 안아주는 집을 꿈꾼다.


완성된 말만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라 늦게 도착하는 말, 방향을 잃은 말들을 다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집이리라.

연명지 시인은 말을 더듬으며, 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조용한 방을 마련한다. 그 방 안에서 말은 완성될 필요가 없다. 머뭇거려도 되고, 발자국만 남아도 되고, 때로는 흔적만 있어도 된다.


그래서 시집 『미안하다는 말의 집은 어디일까』는 아직 닿지 못한 말, 닿으려고 애쓰는 말들을 위한 집이다. 독자는 그 집 문턱에서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말 하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의 말은 흔들려도 괜찮다. 더듬거려도 괜찮다. 또 조금 울어도 괜찮다. 이 시집이 그런 말과 마음을 놓아둘 방 하나를 마련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우리 만나자.


■ 연명지 시인의 말


“사랑해”라는 말과

“미안해”라는 말은

하나의 등뼈를 갖고 태어난 걸까?

사랑한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잊힌 목소리를 불러내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를 서로 연결해준다.

각자 독립적이면서, 자유롭다.

때로는 어긋나는 말 같지만 서로 쓸쓸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힘들지만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말!

사랑해와 미안해 사이에서 시를 쓴다.

하염없이….


시를 짓는 일은 봄날, 손목을 여는 일이다.


■ 연명지 작가 약력


시인 연명지는 2013년 미네르바 시선 『가시비』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과처럼 앉아 있어』, 전자시집 『열일곱 마르코 폴로 양』, 여행 산문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가 있다. 호미문학상, 청송객주문학상, 항공문학상을 수상했고, 시 작품이 인도, 파키스탄, 코소보, 이탈리아, 이집트, 미국, 벨기에 등에서 현지어로 번역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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