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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명지 Jul 06. 2023

사과처럼 앉아있어

                                    

                                          연명지



호흡이 깊은 우모로 

 그림을 그릴 때는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어야 해

 가령, 간질간질 사과를 간질이는 빨간 햇살에도

 사과는 얌전하게 앉아있지

 모델은 가끔 햇살 쪽으로 오른뺨을 돌려

 빨갛게 익은 햇살을 빌려와야 해

 사과에게 햇살은 빨강

 빨강은 가끔, 사과를 고쳐 앉으라고 주문하지.


 사과는 봄과 여름을 번갈아 땋고 양 갈래 머리가 길어지는 동안에도 사과는 맨 처음 꽃의 자세로 앉아있지. 핑그르, 돌고 싶은 날에도 햇살은 사과처럼 앉아있으라고 했지


 멀리 아란섬에서 불어오는  

 풍향을 받아 적다보면 사과의 배는 불룩해지고

 손거울도 없는 모델은 왼쪽 뺨을 돌려

 빨갛게 색의 채도를 높여가지


 한 알의 사과로 만족하는 햇살은 없어 

 꼭지는 자꾸 사적인 생각 쪽으로 떨어지려 하고

 봄부터 세잔의 구도構圖에 붙잡힌 사과는 

 늦가을이 되어서야 술 냄새를 풍길 수 있지


 파이프를 문 햇살이 팔짱을 낄 때

 누군가 앉아있는 사과를 뚝, 딸 때

 햇살과 별개의 관계가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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