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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고아원

(시현실 2025 봄호)

by 연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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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좁은 산도를 지나가요 조심스럽게

초원을 뛰어다니던 목소리들이 담장을 넘고 남 이야기 하듯 가볍게

말을 좋아한 사람들이 말을 모아 집을 짓고

출산을 했다고 축하를 받아요


읽는 사람의 심장을 다치게 하는 살아있는 말들이 좋다고, 말은 당근을 먹으며 오물거려요


엄마 손을 놓친 불안전한 말들이 쌓여가는 식탁에서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의 말을 발라먹고 있어요

가시가 눈을 찌르기도 해요


빛바랜 사진 속에 웅크린 문장을 만나면 슬픔은 먼지처럼 날아가요

우기에 젖어있던 지난날을 스윽 열고 들어와 이마를 짚어주는 문장이 나를 살게 해요


말이 잘 자라도록 정성을 다해 물을 주고

가만가만 쓸어주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요

일상과 나의 몽상 사이에서 즐겁게 거닐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시집 갈피마다 지문들이

울컥울컥, 고여있어요 버려진 시집들

잊혀진 것들을 다시 부르는 밤이 제일 무서워요


머릿속에 가끔 에러 창이 뜨는 날은 허리를 비틀며 나아갔어요

시집 속에 잠시 앉아있다 일어나면 말들이 장난치듯 새벽을 만나는 날이 있어요


시집을 벗어난 새들은 모두 고아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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