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늘에 대한 서사
- 은의길 (세비야 ~ 귀예나)

by 연명지

4.그늘에 대한 서사.jpg

여호수아 1:9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스페인 산티아고 은의길은 세비야 대성당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1007Km를 걷는 순례길이다. 프랑스 길에 비해 숙소나 식당 등 인프라가 부족해 다른 길에 비해 걷는 사람이 적다. 그래서 절대고독의 길이라고 한다.


아침 6시에 세비야 대성당을 출발했다. 길을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를 만나면서 드디어 걷기 시작이라는 생각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쯤 왔을 때 터만 남아있는 로마시대 유적을 보고, 첫날의 기대와 호기심이 넘쳐 15Km 정도의 들판을 걸었다. 그늘 없는 뜨거운 길이 오래 이어지고 내 속에 들끓던 소리들이 달아오른 햇살에 튕겨져 나왔다.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목화밭을 지나면서 2년 전 사리아 숙소에서 만난 글을 생각했다.

“산티아고 길에는 이방인이 없다. 아직 우리가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있을 뿐”

나는 누군가에게 길 같은 친구였던 적이 있었을까. 서 있을 수만 있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자코메티의 조각들도 생각났다.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한 거야. 긴 그림자를 보며 내 안의 그림자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 내 안의 불평들이 길과 버무려진다. 산티아고 길은 길이 나를 불러주어야 올 수 있는 곳이다.

어느 길을 가던 그곳이 내게 몸을 열어주어야 그 길을 지나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싶은 그런 날, 나는 은의길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