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본을 매고 가는 인도네시아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by 오후세시

여보게, 인니 갈 땐 뭘 가지고 가나


인천공항. 나는 코이카 해외봉사단 신분으로, 살면서 찍은 사진 중 최악이어서 사실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열심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리본...

싶지 않은 사진이 붙여진 적색 여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게다가 회색마의에 검은 정장바지, 곱게 단 리본과 에나멜 구두의 단복차림은 가히 선수단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우리 여자단원들은 그 리본을 매는 것에 꽤나 열심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리본은 밋밋한 단복을 세련되게 살려주는 포인트였기에 잘 매어준다는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아마 가볍고 편한 복장이어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단복은 우리가 해외봉사단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도구였고 그에 따른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자카르타에 내려서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리본을 꼭 매고 있었던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건 바이올린?” 유난히 하얀 얼굴의 이렌(이하 단원들 이름은 현지이름으로 합니다) 언니는 본인의 이미지하고 너무 잘 어울리는 물건을 가져왔다. 짠띠까는 비데 대신이라며 물 티슈를 잔뜩 들고 왔다. 동기중 막내였던 까르띠까 양은 삼순이(돼지인형)를 가져왔다…. 물론 모두의 가방 안에는 고추장 하나쯤은 챙겨져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들고 온 것은 인도 배낭여행기를 써놓은 수첩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글을 다시 읽으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활필수품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치약이나 칫솔, 속옷들은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챙겨 온 옷 무게만 13kg 인건 안 비밀) 동생이 사서 1년 정도 쓴 노트북도 사정하고 협박하여 들고 왔다(재정상태가 험악하여) 커다란이민가방 같은 짐을 보고 있으면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해외봉사단원은 어떻게 된 거야


해외봉사단의 계약은 2년간이며 연장도 중도귀국도 가능했다. 그 ‘중도귀국’라는 네 자에 일 년 동안 많이 흔들렸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귀국할 사람처럼 방방 뛰었다. 어쩌다가 그런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었을까?

6년 전, 아무 생각 없이 떠난 인도배낭여행에서 만난 지역공부방 자원교사와 나눈 몇 마디 말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할 수 있다. 그 계기로 내가 사는 지역의 공부방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4년 동안 아이들의 웃음을 에너지로 삼는 자원교사로 활동하면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면서도 만들 수 있으며 행복 또한 스스로 가꿀 수 있는 꽃밭 같은 것이라 여길 수 있는 황금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던 중 코이카를 알게 됐다.

‘해외봉사’라는 4자는 내 남은 인생을 전부 쏟아붓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고 황홀한 단어였다. 인도여행에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던 새카만 피부에 아름다운 큰 눈을 가진 아이들을 또 만나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아이들에게 다양한 인생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코이카 계약서에 내 이름 세자를 써넣었다. 내 욕심을 채우기에 이만한 자리는 또 없었다.

면접을 보던 날은 너무 떨려서 청심환을 사 먹고 갔다. 그만큼 절실하게 원했던 일이었다. 기억나는 질문은 외로움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에 관한 거였다. 파견단원들은 도시로도 가지만 오지에 단독부임하는 경우가 많아 외로움에 취약하다(그게 바로 내가 될 줄은...) 나는 20살 때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개인사를 풀어가며 외로움의 외자도 모르는 사람으로 포장하였다. 그땐 진짜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임지파견 후에 외로움에 눈물 콧물 다 흘린 건 한참뒤의 일이다.(그리고 이렇게 외로움을 절절하게 느끼고 귀국한 이 경험은 또 한 번 나의 인생방향을 바꿔놓게 된다)


왜 인도네시아로 가는 거야


‘이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없다’ 지원국가에 관해 알아보러 서점에 갔을 때 눈에 띈 인도네시아 회화 책에 적힌 글귀였다. 코이카 단원은 현지어 습득이 필수였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두려움도 제법 크다. 그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꿔준 글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희망국가를 지원할 때 패기롭게? 1 지망, 2 지망, 3 지망 모두 인도네시아를 적어 넣은 것이다. 합격이 결정되고 국내훈련(현지어 습득과 이것저것을 위해 한 달가량을 합숙훈련을 했었다. 현재는 훈련의 형태가 바뀐 것으로 안다)을 들어가기 위해 컴퓨터를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인도네시아에 간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친구들은 세계지도를 찾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선생님은 돈 벌어서 시집갈 나이예요”라면서 충고해 주는 녀석들도 있었다. 초등학생인데도 나보다 현실적인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웃음이 났다. 하지만 해외봉사 가기 딱 좋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는 나이 29살이었다.

SNV18460.JPG 20대의 끝자락을 걸어놓고 온 인도네시아의 야자수

그렇게 나는 해외봉사단원으로서 인도네시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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