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바로 내 앞에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고 살짝 잡아 뜯어서 오물조물 주무르면 어떤 모양이든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상상으로 밖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 또 아쉽다. 저 구름 너머로 피터팬이 사는 ‘네버랜드’를 만든 작가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하늘에서 보는 풍경은 언제 봐도 신기하고 지루하지 않다. 흔한 표현이지만 정말 딱 들어맞는 솜털 같은 구름, 그 밑으로 큰 뱀처럼 보이는 갈색빛깔의 강이 힘차게 구불구불 헤엄쳐 먼바다로 나아갈 듯 자리했다. 그리고는 온통 나무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갈색의 강과 녹색의 나무. 그게 내 발 밑의 전부인 듯했다.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자 비로소 강에 떠있는 작은 배들의 존재가 시야에 들어오고 트리 밑의 선물상자처럼 모여있던 것들이 집이라는 형태로 보인다. 그 규모가 제법 되어서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말았다. 귀가 잠시 먹먹해지고 몇 차례의 방송이 나오고 덜컹하는 순간도 잠시 비행기는 100미터 선수처럼 빠른 속도로 지상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도착지점은 바로 인도네시아 지역 명으로 서부 깔리만탄이라고 부르는 보르네오 섬의 남부에서도 가장 서쪽. 주도 폰티아낙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폰티아낙
보르네오 섬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로 나뉘어 있다. 한 섬에 세 나라가 함께 있는 유일한 섬이며 내가 지금까지 가구회사 이름으로만 그 존재를 인식했던 곳이다.(나뿐이 아닐 거야) 비행기에서 내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흙냄새와 함께 왜 가구회사이름을 ‘보르네오’라고 지었는지 알만한 풍경이 나를 둘러쌌다. 론리플래닛에 실릴 만한 구미가 당기는 풍경은 아니지만 공항 주변엔 녹색 벽이 죽 쳐져 있다. 전부 나무고 풀이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같이 눈높이를 맞췄던 솜털구름들이 바로 내 머리 위로 내려와 있었다.
반은 나무고 반은 하늘이었다.
공항 밖에서 수기오노 씨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포터아저씨와 이민가방 하나 25인치 들들이 가방 하나를 찾아서 공항을 빠져나갔다. 몇 안 되는 포터아저씨들과 적은 여행객들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흡사 시장 통 같다. 공항이 그만큼 작은 규모이기 때문이다. 수기오노 씨는 싱까왕에서 나의 행정업무들을 봐주실 코워커이다. OJT기간에 한번 뵈었기에 먼 거리를 마중 나와주신 아저씨가 나도 무척 반가웠다. 아저씨는 나를 픽업하기 위해 30만 루피아의 유료로 차를 빌려왔다. ‘어서 와요 깔리만탄에! 잘 지냈어요?’ 수기오노 씨의 반가운 인사말로 드디어 내가 임지에 파견됐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자카르타에서 한 시간 반을 날아왔을 뿐인데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기분은 기분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자카르타에서는 항상 에어컨과 함께라 ‘빠나스’(덥다)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깔리만탄에 오자마자 ‘빠나스’라는 말을 수 도 없이 하게 됐다. 수기오노 씨가 빌려온 차가 에어컨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공항이 있는 폰티아낙에서 싱까왕까지는 4시간! 길은 막히지 않아 창문으로 들어올 바람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걸 느닷없는 교통체증까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땀 흘리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가만 보니 내가 탄 차뿐이 아니라 에어컨을 켜고 있는 차가 드물었다. 오토바이는 물론이거니와 버스도 택시도 창문을 열고 더운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기오노 씨도 땀을 흘리면서도 ‘빠나스’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빠나스?’라고 물어올 뿐.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거야. 깔리만탄의 뜨거운 환영을 온몸으로 받고 앉아있자니 어느덧 교통체증이 풀려 수기오노 씨의 예의 그 치고 나가기 운전 법이 구사되면서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 졸고 일어나니 기분이 산뜻해져서 수기오노 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인드리씨(나의 현지이름이다)는 인니어를 잘하시네요’ 수기오노 씨의 칭찬이 듣기 좋다. 하지만 바하사 인도네시아 공부는 이제부터 실전이다.
내 입맛을 저격한 인도네시아 빠당 음식.
싱카왕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6시가 넘어간다. 배꼽시계가 그 누구보다 정확한 나는 배가 고파지고 내가 좋아하는 빠당음식을 먹고 선배네 집에 짐을 풀었다. 살 집을 구하기 전까진 선배네 집에 신세를 질 예정. 오늘은 집에 물이 안 나오는 날. 받아놓은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그래도 우리 집 마냥 너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