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25
어릴적 찢어지게 가난했다라고 말하기에는 의, 식, 주 중 의와 식은 그나마 채워졌었다. 학생이었기 때문에 옷이야 늘 입는게 교복이었고, 밥은 라면으로 떼우기가 일쑤였는데 아버지가 만들어주던 비빔밥에는 일반적인 비빔밥 재료가 아닌 다른 무수한 것들이 들어갔다. 특히 마지막에 생계란이 비벼진 마무리는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조금 다르지만 늘 먹어왔던 특별할 것 없는 한 끼의 식사일 뿐이었고 맛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그 이상의 가치는 부여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이혼을 하시고 아버지와 살게 된 이후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로써, 적어도 누나보다는 무덤덤하게 이 상황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견딘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마치 감정적 마비가 된 듯이 사실 그 당시에 견딜만큼의 힘듬이라고 느끼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아마도 아버지에게는 하루 하루가 견디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당시 처음 컨버스의 단화가 유행을 하기 시작했고 10만원을 호가하는 지금과 다르게 처음 나온 당시 21,900원 혹은 19,8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에게는 사치로 느껴졌는지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에게 신발을 사야하니 5천원만 달라고 하며 아버지 가게 앞 횡단보도 근처에 좌판을 깔고 있는 아저씨에게 가서 그 중에서 최대한 괜찮아 보이는 신발을 사기가 일쑤였다. 혹여나 친구들이 보기라도 할까봐 최대한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좌판에서 신발을 사는 게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검정봉투를 들고 돌아섰다.
그 중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까, 아직 친구들과 서먹서먹하고 서로 알아가는 중에 내 기억으로 물청소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젖어있는 화장실을 걸어서 였을까 그렇게 샀던 내 신발은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밑창이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누군가 알아채면 부끄러움에 무너져버릴 것 같아 식은땀이 흐르는 상황이었다. 혹여라도 친구들이 눈치챌까봐 최대한 뛰지 않으며 충격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걸으며 겨우 집까지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집에 돌아와서는 최대한 넓게 본드를 펴 바르고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 처럼 라이터로 불을 살짝 붙여서 말린다음에 밑창을 붙였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아 결국은 버렸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의와 식은 견뎌낸다는 느낌없이 보냈지만 문제는 집이었다. 이혼후에는 집을 이사를 해야되야만 했는데 당시 우리집은 학교 바로 코앞에 있던 슈퍼 윗집이었고 슈퍼 아줌마 아저씨가 주인집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버지는 이사 갈 곳을 찾았다고 했고 나중에 들어보니 이사하면서 주인집에서 그나마도 돈을 꾸었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오래된 프라이드(자동차)를 이용해서 짐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트럭을 용달할 돈도 돈이었지만 이 마을(마을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에)은 외부인이 이사를 들어가는 게 알려지면 안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가게 문을 닫고 나서 밤마다 조금씩 차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타워팰리스가 보이고 대치동과 멀지 않은 곳, 뒤에는 산으로 둘러쌓인 곳, 그곳은 바로 구룡마을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소외된 곳으로 느껴지는 이 곳은 말그대로 판자촌이었다. 21세기에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곳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놀라웠다. 5~6평남짓의 공간이 우리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 되었는데, 바깥문과 안쪽 문 사이의 공간에는 등유로 작동하는 보일러가 있었고, 안쪽 문을 들어가면 신발장과 세면대, 샤워실이라고 부를만한 가로 세로 1m 남짓의 시멘트로 발린 공간이 있었고 주방이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또 공간을 나눠서 안쪽에 누나의 침대가 놓였고 아버지와 나는 신발장/세면대/화장실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바깥 나무판자 문과 안쪽 문 사이에는 플라스틱 엔진오일통을 세로로 잘라서 놓은 요강이라고 부를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 없던 것이 있었다.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큰 일을 볼 화장실이 없었다. 도대체 몇가구가 쓰는지 모르는 공사장에 설치되는 플라스틱 공용화장실 1개와 나무판자로 벽과 문이 세워진 화장실이 나란히 집에서 한 20미터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 곳에서 누나는 얼마 살지 않았고, 나는 해외에 있던 기간을 뺀다면 그래도 한 6~7년 정도는 될 것 같다. 참 이상하게도 지금 생각하면 비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몇번 혼자서 소주를 마시거나 남몰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제외하곤 크게 노력없이 지나갔다.
덕분에(?)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게 되었고 특히 인도에 갔을 때는 마치 몇년 살아왔던 사람처럼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돈에대해는 오히려 적대감이 생겼고 늘 돈과 행복을 따로 생각했다.
청소년기에는 많은 친구들이 자기가 제일 불쌍한 사람처럼 무엇에도 숨거나 변명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씩 만들어 놓는데, 그 때의 나에게는 그 집과 생활이 큰 무기였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늘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고 말하지 않았지만 늘 위로받고 싶어했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는 걸 보니 그래도 내 주머니속에 넣어두었던 뾰족뾰족했던 돌이 어느새 둥글둥글하게 매끈한 표면을 갖게 되었나보다.
사실 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지는 꽤 되었고, 다른 의미에서 나에게 무기가 되었다. 누군과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면 으례 나는 내 이야기를(물론 자연스럽게) 터놓곤 한다. 그러면 보통은 상대방또한 활짝 마음을 열어주기 마련이다. 이렇게 털어놓으면 마음편한 것을 조그만 것에도 부끄러워 했던 어린 마음에는 왜 그렇게 숨기고싶었는지 이해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