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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남 카라 Sep 24. 2024

Prolouge, 딸이 딸을 낳다.

  딸이 자신을 닮은 딸 유나를 낳았다. 할배라는 복잡 미묘한 단어를 내 삶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마음 정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얼떨결에 유나 할배가 되었다. 딸의 딸을 본다는 기쁨과 함께 내가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는 할배가 되었구나 하는 허탈감이 잠시 교차했다. 유나는 나와 육체적이고 정신적으로 실타래처럼 얽힌 긴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다. 그런 유나가 우렁찬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면서 나의 삶에도 미묘한 파동을 전해왔다.   


  유나를 품에 안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곧이어 유나 심장의 미세한 고동이 나의 심장으로 전해오면서 일체감이 느껴진다. 유나와의 만남은 목적 없는 순순한 기쁨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잘 키워야겠다는 책임감과 무게감 때문에 딸이 태어났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감정들이다. 유나에 대한 책임감은 딸과 사위에게 넘기고 나는 유나를 통해 순수한 기쁨만 누리고 있는 것이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네"의 제목처럼 우리 가족들은 유나의 몸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자신과 닮은 부분을 찾으면서 유나와의 동질성을 찾기 바쁘다. 유나의 유독 긴 발가락들은 할매의 발가락을 꼭 닮았고 돌출 흉곽은 할배를 닮았다. 그리고 유나의 유독 흰 피부는 딸을 닮았다. 유나는 딸을 통해 외가의 32억 개의 염색체 염기쌍을 물려받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삼 생명의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딸이 우리 집에 사정상 일 년 동안 머무르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유나의 육아 전선에 딸려 들어갔다. 게다가 할매가 관절염이 심해지고 엄지발가락까지 부러지면서 집안 일과 유나 돌봄이 대부분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인생 내비게이션 글쓰기를 시작한 터라 이래저래 유나 육아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딸과 유나와 행복한 일 년의 추억을 만들어 보기로 하고 적극적으로 유나 육아에 동참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꾸준히 해왔기에 부담이 없었지만 유나 육아와 돌봄은 30년 전에 딸을 키우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처음에는 우는 유나 안아서 달래기, 분유 먹이고 트림시키기, 졸린 표정 감지하고 재우기, 젖병 닦기, 기저귀 갈아주기, 응가 치우고 닦아주기, 목욕시키기 등 하나하나가 서툴렀다. 그러나 이제는 딸을 키울 때 했던 기억들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이제 제법 능숙하게 유나의 육아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


  딸이 7시 30분경 잠에서 깨서 우는 유나를 데리고 위층에서 내려오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유나가 울면 왜 우는지 몰라서 꽤나 애를 먹었다. 유나의 우는 목소리는 커도 너무 큰 데다가 자신의 요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악을 쓰면서 운다. 특히 배고픔은 참지 못해서 조금이라도 분유 먹이는 게 늦어지면 기함을 하고 운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배가 고파서 우는지, 졸려서 우는지, 쉬나 응가하고 우는지, 몸이 안 좋아서 우는지를 잘 분간한다.


  아침에 유나가 위층에서 내려오면 조금 안아주다가 뉘어 놓고 나도 옆에 나란히 같이 눕는다. 유나의 작은 손을 살포시 잡고 유나의 눈을 쳐다본다. 유나도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 순간 내 안의 영혼인 작은 왕자와 유나의 영혼인 현자가 서로 감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린 유나는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할배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한다는 현자의 표정처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딸도 태어나서 처가에서 일 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딸은 가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외할머니께서 나를 이뻐하셨다는 데 어떻게 이뻐하셨어" 기억을 더듬어 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지만 매번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기억도 가물가물 하거니와 나의 생각과 장인 장모님의 생각과 감정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처가에서 딸이 보냈던 시간을 잘 기록해 놓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르신들도 우리 부부도 당시에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나지 않았다.  


  30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다시 비슷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딸은 결혼해서 유나를 낳았고 딸과 유나는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다. 유나가 언제가 엄마에게 할배와 할매를 물어볼 것 같다. 두 분은 어떤 분이셨고 나를 이뻐하셨는지 등을 말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할배와 할매는 세상에 없을 것이고 나이 든 딸도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할매와 할배 그리고 딸과 유나 이렇게 3대가 함께했던 행복했고 찬란했던 2024년을 이야기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우리 3대가 유나와 함께 한 잔잔하고 소중한 일상들을 '딸이 딸을 낳다'라는 제목을 붙여 글로 정리한 후 출간해서 유나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었다. 할배와 유나는 시간이 흘러도 이 책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인생 내비게이션 시리즈가 자녀들을 위한 선물이라면 이 글은 유나와 함께한 할배의 육아일기이자 엄마와 할배 할매가 유나를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키웠는지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글이란 생각이 든다.


  유나가 사춘기를 맞이하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려가는 삶의 여정에서 할배의 글들이 유나에게 기쁠 때는 기쁨을 함께하고 힘들고 외로울 때는 삶의 위로를 전했으면 한다. 또한 유나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이나 근원에 대한 회의가 생길 때마다 할배의 글을 읽어보면서 유나가 자신의 길을 현명하게 찾아갔으면 한다. 할배도 글을 쓰면서 유나를 통해 생명의 경이로움과 평온함을 느끼고 있고 앞으로도 깊은 공감과 위로를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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