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패러독스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현재 이 사회를 어떤 사회로 보고 있느냐이다. 이 사회를 제로섬 사회로 보고 있느냐, 비제로섬 사회로 보고 있느냐에 따라 해결 방안이 완전히 달라진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방법,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방법,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 등이 제로섬 사회인가 비제로섬 사회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제로섬 사회는 1980년, 미국 MIT 대학 경제학자였던 레스터 써로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제로섬 사회는 사회적 이득의 총합이 0이 되는 사회이다. 사회의 생산량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 이익을 얻으면 다른 누군가는 손실을 보아야만 한다. A가 10의 이익을 얻었으면, 그 사회 내에서 누군가 반드시 10의 손실을 본 사람이 있다. B가 10의 손실을 얻을 수도 있고, C가 5, D가 5의 손실을 입어 합 10의 손실을 보았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비제로섬 사회는 사회적 이득의 총합이 0이 아니라 플러스 상태, 또는 마이너스 상태가 될 수 있는 사회이다. 마이너스 상태는 사회적 총합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상태를 말하는데, 현대 경제는 이런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마이너스 비제로섬 사회는 별로 상정하지 않는다. 보통은 플러스 비제로섬 사회를 이야기한다. 비제로섬 사회에서 사회적 이득의 총합이 20인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A는 10의 이익을 얻고, B도 10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A는 10, B는 5, C는 3, D는 2 식으로 모든 구성원이 다 이익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손해를 보지 않고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비제로섬 사회이다.
제로섬 사회인가 비제로섬 사회인가에 따라 경제 정책은 완전히 다르다. 빈부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실시한다고 하자. 이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이다. 부자의 재산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방법이다. 사회의 총합이 0인 상태에서 누군가를 보다 낫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보다 못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는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부자, 자본가를 공격한다. 자본가의 탐욕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못사는 것이다. 자본가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고, 이들의 이익을 제한하려 한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더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시조인 칼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잘사는 이유는 노동자의 몫을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자가 못하는 이유는 정당한 자기 몫을 자본가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노동자가 자기 몫을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 마르크스의 이론이 정당한가 아닌가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지만, 한가지, 칼 마르크스 이론은 제로섬 사회에서의 발상이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자본가도 나아지고 노동자도 나아질 수 없다. 자본가가 더 잘살게 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더 못살게 된다는 것이고, 노동자가 더 잘살기 위해서는 자본가가 망해야 한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칼 마르크스의 논리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산업 진흥 정책을 어떻게 볼까. 제로섬 사회에서는 새로운 사업이 만들어지면 안된다. 새로운 사업이 실행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돈을 더 벌기위해 사업을 한다는 뜻이다. 이 사업자가 돈을 번다는 것은 사회의 누군가가 더 가난하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 아무리 새로운 사업이 기존보다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나온다. 다른 누군가를 희생해서 사업가가 돈을 버는 것이다. 이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누군가 새로운 사업을 실행하는 것은 금지해야 할 사항이다.
누군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는 것도 좋은 것으로 볼 수 없다. 내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이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벌려는 사람은 탐욕스런 사람이고, 부자는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나쁜 사람이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부자를 안좋게 보아온 것은 바로 조선, 고려시대가 제로섬 사회였기 때문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중세의 유럽 사회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제로섬 사회였고, 중국, 일본, 동남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기 전, 전세계 경제성장율은 연 0%대의 제로섬 사회였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부자를 욕하게 되어 있다. 소수의 부자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기 때문이다. 재물에 욕심을 내는 것도 부정적으로 본다. 누군가 재물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재물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 사회에서 부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재물에 욕심 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제로섬 사회에서는 그게 사회 전체적인 이익에 더 낫기 때문이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사회적 갈등이 굉장히 심하다. 그리고 변화를 좋게 보지 않는다. 누군가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지원하려 하자. 그럼 반드시 그 지원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는 집단이 존재한다. 이 손해보는 집단은 자기가 새로 번 수익의 일부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몫을 빼앗긴다. 반발하고 저항할 수 밖에 없다. 꼭 부자, 자본가들만 반발하는 것이 아니다. 버스 회사를 도와주려하면 택시회사들이 반발하고, 전통시장을 도와주려하면 마트 상인들이 반발하는 식이다. 누군가 돈을 벌면 나는 손해를 본다. 다른 사람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해야 나의 수입이 유지된다. 다른 사람이 무얼 하는 걸 반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제로섬 사회에서는 변화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변화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보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손해보는 사람은 그런 변화를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에 비유한다면, 제로섬 사회에서는 학생들의 점수 총합이 1000점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과 같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점수 총합은 항상 1000점이다. 지금 현재 A는 400점, B는 300점, C는 200점, D는 100점으로 1000점을 나누어가지고 있다고 하자. 만약 A가 더 열심히 공부를 해서 500점 더 좋은 성적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 그럼 B, C, D의 점수 총합은 600점에서 500점으로 떨어져야 한다. B, C, D는 A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한다. 공부하지 말고 놀라고 설득하고 유혹한다. A가 점수를 더 받으면 자기들 점수는 떨어진다. 공부를 가장 못하는 D가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하려 하면 A, B, C는 이를 축하해주고 독려할 수 없다. D가 성적이 오르면 자기들 성적은 떨어진다. 공부하려는 D에 대해 비난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한다고 욕을 하게 된다.
선생이 보기에 D의 성적이 너무 낮아 D의 성적을 올려주려 한다하자. D에게 150점을 주려 하면 A의 성적은 350으로 낮아져야 한다. A는 결사적으로 반대할 수 밖에 없다. A의 점수와 상관이 없다면 D 점수를 올려주는 것을 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로섬 체제에서는 자기 점수를 떼어서 주는 것이다. 400점으로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데, 그냥 50점을 떼주라는 말에 반발할 수 밖에 없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쉽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서 강제로 뺏어서 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사회 갈등이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칼 마르크스 사회주의론이 혁명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로섬 사회에서는 협상과 타협으로 문제해결이 잘 되지 않는다. 사회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혁명이 이루어져야 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로의 부의 이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어쨌든 제로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빈부격차를 줄이려면 자본가, 부자로부터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밖에 없다. 제로섬 사회에서의 복지정책은 이런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