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오랜 시간 함께 어울려 살았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처음엔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다가오지 않았다.마음의 동요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런데 만나는 지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울먹이고, 섭섭해하고, 세상 다 잃은 표정을 보여주고..., 그 반응들을 보며 감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이곳에서 지내온 삼십여 년을 돌아 보게 됐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스쳐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오고, 울컥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남는 건 우장산이었다. 예전에 기우제를 지내던 산으로 기우제를 마치는 날에는 반드시 비가 와서 우장을 준비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봄이면 벚꽃길과 개나리가 눈길을 끌었고, 쪽동백나무 군락지는 인공적 조림이 아닌, 스스로 뿌리내린 자연 군락지라 더 특별했다. 특히 보랏빛 종 모양의 쪽동백꽃이 환상적이었다. 여름에는 산 전체가 짙은 녹음으로 뒤덮이고, 축구장과 농구장, 테니스장에는 사람들의 활기가 가득했다. 맨발 걷기, 산책, 운동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도 많이 있다. 특히 가족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었던 길, 지인들과 깔깔되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유쾌하게 거닐었던 길, 초면이어도 반갑고 자연스럽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울리며 다니던길... 아이러니하게도 이제야 그 소중함이 새롭게 다가온다.
또 내가 좋아하는 재래시장이 두 군데나 있었다. 대형마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다정함과 인정이 아직도 넘친다. 상인들은 소소하게 안부도 물어보고, 단골에게는 덤도 슬쩍 얹어준다. 특히 명절이면 전집이나 나물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곤 한다. 이런 정겨운 시장 풍경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집에 들어올 때는 지하 주차장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아파트 풍경을 잘 볼 수가 없다. 가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 몇 동 앞에 벚꽃이 피었네""몇 동 앞에는 수국이 너무 예뻐!"같은 말을 듣곤 했다. 다음에 꼭 봐야지 했던 풍경들. 이제는 당분간 볼 수 없겠구나를 생각하니 괜히 찡해진다.
슬픔과 기쁨, 아픔과 행복이 뒤섞인 날들이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같지만 돌아보면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함께 하지도 못했던 시간들이 많았다. 미루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에 나자신에게도, 모두에게도 미안하고 감사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그 믿음과 함께 이사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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