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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n 24. 2022

자아탐색일기 2: 죄책감 인간

자기비하감, 죄책감의 근원을 어린 시절에서 찾아보기

죄책감을 어떻게 다루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병리적인 죄책감에 시달려온 나로서는 이것이 언제나 해결 과제 중 하나였다. 병원을 찾아가게 된 계기도 심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서였다. 이번 상담 시간은 '죄책감 인간'이라 할 정도로 뿌리 깊은 나의 죄책감의 근원은 어디일까를 찾아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특히 대인관계에서 불안과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상담 선생님께선 이러한 불안이 아마 따돌림 경험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셨다. 하지만 나의 이런 불안 증세는 따돌림 이전에도 있던 감정들인데? 사소한 말실수 하나에도 밤잠을 설치는 일들이 많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통제적이었다. 아토피 때문에 먹고 싶은 것들을 먹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유기농 음식 아닌, 과자나 사탕, 불량식품 같은 것들은 절대 먹지 못하게 하셨다. 부모님이 너무 두려워서 몰래 먹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혼도 많이 났다. 내가 뭐든 잘하는 편이고 장녀라서 기대도 많이 받는 편이었다. 부모님께선 내가 무엇을 하든 기대치가 높으셨다. 나는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이였는데, 상담 선생님께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서 지나치게 많은 기준들에 맞추려 하다 보니 자신이 수용되는 폭이 너무나도 좁은데 어린아이가 그 기준에 다 맞추지 못하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그건 아이의 탓이 아니라 어른의 탓이라고 하셨다. 심한 죄책감은 이런 통제적인 어린 시절 가정환경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주 좁은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영역의 일들이 죄책감이 되었던 것이다. 따돌림에서 비롯되었다기엔 오래된 감정들이어서 이게 더 타당성이 있겠다 싶었다. 어렸을 때 친구의 책을 잃어버려서 책을 돌려줄 수 없어 엄마에게 책을 사달라고 전화했어야 했을 때의 두려움을 기억한다.


 이런 통제적인 가정환경과 나에 대한 높은 기대치로 인해서 내가 상처를 받는 일은 여러 번 계속되었다. 가장 상처가 되었던 말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때 부모님께서 그래도 네가 대인관계를 잘 이끌어 내서 돌파구를 찾았어야 하는 것 아니었냐 하는 얘기였다. 아니 대체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하냐고.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따돌림을 당하기도 쉽다고 한다. 자신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기준에 벗어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들도 이해가 갔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고어를 좋아하는 취미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었다. 이러한 취미는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유치원 시절에 내가 이집트 문명에 관심을 갖게 된 유일한 동기는 미라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때에는 미라를 어떻게 만드는지, 장기를 담는 용기의 이름이 무엇인지까지 다 외우고 있었다. 또 인체의 신비 전을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전시회를 관람 후 도판을 구입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사람 몸으로 뭐 하는 짓이냐면서 내가 그 도판을 보지 못하게 집 구석에 숨겨놓았다. 그게 유치원 때 일이었는데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그 책을 찾아 헤매었다. 결국 5학년 때 그 책을 찾아내서 기어코 보고야 말았다. 이렇게까지 죽음의 이미지, 잔인한 것들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나의 통제적인 어린 시절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하셨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고착화되고 그래서 그런 파괴적인 이미지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어린 시절의 애착관계가 성인 때까지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엄마가 그런 파괴적인 이미지를 싫어하는 것까지 완전히 죄책감을 '장착'하게 만드는 가정환경이었다. 나는 '죄책감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심하게 양분되어 있다고 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집착하는 것과 분리하고 밀어내는 것, 차가운 겉과 뜨거운 속 등.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양가성일 것이다. 자기 파괴적인 성향과 자기혐오의 근원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기준에서 벗어난 자신을 참을 수 없으니 자기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모토로 삼을 정도로 항상 중얼거리던 말이 '그럴 수 있지'였는데 말로는 그럴 수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관대한 척해도 스스로는 전혀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양가감정을 통합하면 자신의 부정적이고 못난 모습들을 의식 속에 통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병리적인 죄의식이 덜어진다고 한다. 이미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과거를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아나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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