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기억나는 학생이 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부산에서 중등 검정고시를 같이 공부했던 학생분이다. 영희 씨는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낮에는 백화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하셨다. 눈치가 빠르시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셔서 내가 무슨 내용을 얘기하는지 빠르게 알아들으셨다.
하루는 소설 '이해의 선물'을 같이 읽고, 소감을 나누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어린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은 어른의 배려 아닐까요?"
"선생님, 저도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이 소설 보니까 그게 생각나네."
영희 씨의 이야기는 이랬다. 그녀가 젊었을 적, 부산 동아대학교 앞에서 호떡 행상을 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밤늦게 자주 영희 씨의 호떡 행상에 오는 학생이 있었다. 학생 사정이 딱해서 영희 씨는 그날 팔고 남은 호떡을 공짜로 주셨다. 혹시나 그 학생이 올까 봐 마감할 때까지 호떡을 팔지 않고 남겨둔 채로 기다리곤 했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물어진 어두컴컴한 길가에서 두 사람은 사는 얘기를 하며 친해졌다. 학생은 영희 씨에게 자주 이런 약속을 했다.
"아줌마, 내가 나중에 돈 벌면 꼭 이 은혜 갚을게요 진짜"
시간이 많이 흘렀고, 영희 씨는 호떡장사를 그만두셨다. 그 학생도 아마 졸업을 한지 한참이나 지났을 시간이었다. 하루는 영희 씨가 식당에 있었는데 양복을 입은 회사원이 영희 씨에게 크게 소리쳤다.
"아줌마! 나 기억 안 나요? 내가 아줌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그 학생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그 학생은 취직을 하고 나서 영희 씨를 찾으려고 학교 근처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는 영희 씨는 이미 호떡장사를 그만뒀을 때라 영희 씨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우연히 식당에서 영희 씨를 봤고, 그는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그 학생은 그 길로 영희 씨와 백화점으로 가서 이런저런 선물을 사서 영희 씨께 드렸다고 한다. 호떡 값보다 훨씬 비싼 선물을.
"그러고 보면 나도 인생을 잘못 살진 않았나 봐요. 그런 선물도 받아보고. 호호호"
그렇게 그날 소설 수업은 추억을 회상하면서 훈훈하게 마쳤다. 영희 씨는 그 추억이 '내가 나쁘게 살진 않았나 보다'는 증거로 마음속에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이 날 영희 씨의 얘기는 그 이후 내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책상에 앉은 분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아니라, 내가 배워야 할 인생 선배로 보였다. 한 사람의 인생이 소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장면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영희 씨가 왜 눈에 밟히냐고? 좋은 교훈을 주신 감사함 때문이냐고? 사실 이유는 따로 있다. 그분은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야학을 그만두셨다. 몇 문제 차이로 아쉽게 검정고시에 불합격을 두 번 하시더니, 야학에 나오지 않으셨다.
영희 씨가 야학을 그만둔다고 문자를 보내신 날이 내 마지막 야학 수업 날이었다. 나는 그 당시 취직을 해서 야학을 그만두었는데, 야학 활동을 하는 마지막 날 영희 씨가 공부를 포기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마지막 문제를 풀지 못하고 숙제를 제출하는 기분이었다.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말이 좋지 않으니 눈에 밟힌다.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시험 합격하시려면 국어에서 80점은 나오셔야겠는데요?', '저번에 아쉽게 떨어지셨으니 이번에는 합격하지 않을까요?' 내가 했던 말들이 부담이 돼서 포기하신 건 아닐까.
요즘 나는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학생들에게 검정고시 합격에 연연하지 않길 바란다. 설령 검정고시를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야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것이 추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때도 내가 검정고시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같이 재밌게 공부하자고 했다면 영희 씨는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영희 씨는 야학에서 보냈던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실패를 안겨준 잊고 싶은 기억일지, 아니면 그녀답게 야학에서 배웠던 공부들을 가지고 씩씩하게 사회원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부디 나쁜 기억은 아니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