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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위대하게

by 김룰루

누가 신성한 내 수업에 지방방송을 틀었나. 소설의 시점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교실 한편에서 학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분이서 속닥거리다가, 대각선 학생에게까지 손을 내밀어 뭔가를 물어본다. 그럴 때가 아닌데. 내가 설명하고 있는 게 어려운 거라, 집중해서 들어도 이해할까 말까 하는데.


"거기 무슨 일 있나요? 왜 그러시죠?"


내가 들어서는 안될 비밀 이야기라도 한 듯, 눈빛이 흔들리는 학생들. 알고 보면 '지금 수업하는 내용이 교과서 몇 쪽에 있는 것이냐' 따위의 시시한 것들이다. 나에게 직접 물어보면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일단 설명부터 들어라'라고 핀잔을 받을까 봐 옆 사람을 쿡 찌른 것이다. 여름씨는 선생님에게 질문해야 할 것을 짝꿍 초록씨에게 묻는 버릇이 있다. 초록씨가 여름씨보다 학업성취도가 높고, 교우관계도 원만해서 그렇다. 여름씨는 이미 학습 기세가 꺾여있다. 오죽하면 초록씨가 여름씨를 대신해서 손을 들고 질문을 해줄까? 이런 자신감이라면 여름씨가 우리 야학을 졸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름씨는 우리 야학 3년 차 학생이다. 중등반을 턱걸이로 합격하고, 고등반에서 2년째 공부 중이다. 성적은 그저 그렇다. 아예 수업을 못 따라올 정도로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수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쉬운 내용은 알아들으나,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낙오된다. 노력도 어중간하다. 출석을 열심히 하시지만 집중을 그렇~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긴 하시지만, 구색만 맞춰 오는 경우가 있다.


본인의 실력만큼 성격도 밍숭맹숭한 그녀. 그녀를 수업 뒤 따로 불러서 기초 내용들을 짚어주기도 했다. 요즘 공부는 하고 있냐고 물으면, 그럴 때마다 "이렇게 차근차근 공부하니깐 이해가 되네요. 이제부터 공부 시작해 보려고요."라고 그녀는 전의를 불태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그녀의 열정은 인덕션처럼 잔열이 없다. 그 순간이 지나면 금방 식는다. 그 다음주가 되면 "이제부터는 진짜 하려고요!" 되뇌는 양치기 소년이 된다. 결국 방과 후 나머지 수업은 효과가 없음이 그렇게 증명되고 이내 사라졌다.




"룰루 선생님, 요즘 여름씨가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하고 힘들어하지 않던가요?"


여름씨가 입학하던 시절부터 줄곧 함께 수업을 해온 영어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그는 여름씨에 대해 나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름 씨가 중등반에서는 이러지 않았거든요. 성적이 높진 않았어도 생기는 있었는데, 요즘은 수업시간에 지쳐 보여요. 내가 들어보니깐, 여름씨가 올해부터 일하는 시간을 늘린 것 같더라고."


여름 씨의 본캐는 요양보호사다. 중등반에 있을 때만 해도 파트타임으로 근무했었는데, 고등반에 올라올 즈음부터 근무하는 시간이 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졌을 것이다. 육체적 피로도 예전보다 더 클 것이고. 하루 종일 돈을 벌고 저녁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야학에 오는 건데, 선생님과 동급생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는 그녀. 나였으면 공부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 그녀를 추켜세워줘야 할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쉬이 잊힌다. 훗날 기억되는 건 가장 공부를 잘했던 학생, 가장 선생님들과 교류가 많았던 학생, 가장 인품이 훌륭했던 어머님들이다. 여름씨 같은 고만고만 대부분의 우리는 기억 속에서도 한 줄 뒤에 있다. 그렇다고 이 분들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이 우리 야학 구성원의 다수다. 극적인 사연도, 천부적인 재능도 없지만 공부하고 싶은 이 사람들을 키워내는 게 야학의 역할이다. 야학이 왜 야학인가? 사정상 저녁에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닌가. 그리고 선생님인 나조차도 이 사회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보다 평범한 다수의 자리에 있을 때가 많지 않나. 밍숭맹숭한 그녀의 성격을 탓할 게 아닌게, 내 회사생활도 그렇다. 그럭저럭 일은 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저 튀지않는 사원 A씨다. 욕먹지 않을 정도만 하는 특출 난 재주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잘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모습이 꼭 여름씨와 닮았다. 쉽지 않음을 아는 만큼, 그래서 여름씨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어느 날 초록씨가 수업 전에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우리 야학에 3년 동안 같은 반에서 공부한 사람도 있었어요?"


질문을 보아하니, 여름씨가 올해도 시험에 떨어지면 야학에 부끄러워 나오지 못할까 봐 걱정을 했나 보다. 이를 보고 초록씨가 여름씨를 대신해서 손을 든 것이고.


"당연하죠. 특히 고등반은 그런 분들 많아요."


다음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특히 여름씨같이 낮에 일하시는 분들은 시간 여유가 있는 학생들과 실력이 느는 속도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똑같이 늘 거면 왜 낮에 자습을 하겠어요. 대신에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야 해요. 안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서 공부 못해요. 남들이 일주일이면 외울 거, 나는 2주에라도 내 걸로 만들어보려고 하세요. 그렇다고 자습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든 짬을 만들어서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보세요. 아시겠죠?"


그제야 여름씨는 체한 속이 풀린 듯 안심하는 표정을 보인다. 본인이 잘 해내고 있음을 확인받으니, 그간 답답했던 마음이 풀렸나 보다.


"아니 내가 사실은 저번 시험 때 엄청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검정고시 한 달 전부터는 뭘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머리는 멍해지고. 그래서 속이 답답하고 가슴만 뛰었어요."




일주일 뒤, 시 써오기 숙제 검사날이었다. 대강 봐도 여름씨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시의 표현 방법을 어려워했던 그녀였는데, 의인법까지 활용했다. 다른 학생들은 시도하지 못한 '상징'도 보인다. 여름 씨의 시가 가장 훌륭하다고 교실에서 칭찬하니, 그녀가 쑥스러워한다. 은근히 그녀를 얕보던 우등생 해원씨도 '여름씨한테 이런 소질이 있었네' 라며 그녀에게 격려를 보낸다.


그녀가 중등반 수료식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 애들 키울 때, 애들이 한 번씩 '엄마하고는 대화가 안 통한다' 했었거든요. 요즘 공부하니깐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져서, 이제는 얘기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평범한 여름씨는 위대한 여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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