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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림 받을 준비 되었나요?

by 김룰루

아싸 내일 비 온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운전연수를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다! 마흔이 다돼 가도록 운전을 못하는 남자는 내 주위에 나밖에 없다. 서울에 살면 자동차보다 지하철이 편하다는 나름의 합리화로 버텨왔지만, 이 나이가 되니 체면을 위해서라도 운전은 해야 할 것 같다. 환갑이 훌쩍 넘은 아버지가 가족 여행 때마다 운전하는 것도 민망하고.


그때가 장롱면허 3년 차였던가. 10시간 사설 운전연수를 받기로 했다. 좌회전, 우회전부터 무너졌다. 얼마나 핸들을 돌려야 하는지 감이 안온다. 주변에 차가 많으면 머리가 하얘지고, 선생님 말씀이 한 귀로 들어왔다 다른 귀로 나가버린다. 선생님은 처음에 '남자분이시면 10시간 배우면 혼자 다닐 수 있어요!'라고 하셨지만, 나의 형편은 실력을 보시고는 '까먹기 전에 수업을 꼭 더 하시죠? 이대로 혼자 도로 나가시면 진짜 위험해요'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나마 이때 연결해서 운전을 연습했으면 나았을 텐데, 내 맘대로 안 되는 운전에 겁을 먹고는 그냥 덮어놓고 살아왔다. 자연스레 나의 실력은 무면허 상태로 돌아갔다. 올해 안에는 꼭 운전을 배우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운전학원에 가는 길은 수만 가지 핑계가 가로막는다. 너무 더워서, 괜히 약속을 만들고, 평소에는 관심 없을법한 강연도 괜히 가고 싶어진다.


못하면 싫어진다. 공부도 그렇다. 반대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당연히 공부를 좋아하게 된다. 점수가 높다고 칭찬받고 수업시간에도 남들보다 앞서나가면 누군들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도서관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건, 못하는 사람이 중간의 노력을 하는 것 보다 수월하다.




매년 신학기에 입학원서를 받는다. 입학원서만 들여다봐도 학생들의 향후 출석률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학생은 하루짜리구나, 이 분은 한 달은 버틸 수 있으려나. 힘을 너무 많이 줘서 쓴 글씨나 과하게 삐뚤삐둘하면 보통 일주일 안에 조용히 학교에 나오지 않으신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초등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부터 막히면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교과서를 잘 읽어나가는데, 본인만 헤매는 기분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공부를 못해서 기가 죽을 바에는 차라리 회피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내가 지금까지 운전을 기피해 온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초등반은 한 달 안에 학생 수가 반으로 줄어드는 게 매년 반복되고 있다.


보통 공부를 잘 못 따라오시는 분들은 기가 죽어서 주변 눈치를 요리조리 보기 마련이다. 하늘 씨는 달랐다. 성적은 꼴지라도, 수업 참여는 1등이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할 때면 다른 학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내가 내는 퀴즈에 정답을 말할 자신이 없어서다. 하늘 씨만 틀릴지언정 대답을 한다. 신라 진흥왕의 업적을 물어봤는데 평양 천도, 내지는 삼국 통일을 답한다. 틀리긴 하는데, 저번 시간에 배우긴 한 내용 그 근처에 지식이 널브러져 있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녀의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물리적인 나이와 인지기능을 떼어놓고 생각하긴 힘들다. 나는 상냥한 선생은 못 되는 지라 '하늘 씨, 그게 아니잖아요! 복습 안 하셨죠!'라고 핀잔을 줘도 그녀는 기가 죽는 법이 없다. '그런가요~ 다시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웃으면서 맞선다. 아니, 내가 상냥하지 않아도 되는 건, 하늘 씨가 고깝게 여기지 않을걸 알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굴하지 않고 웃음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이분이야 말로 기존세다.


하늘 씨는 핀잔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답을 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내입장에서는 김이 새는 오답을 매번 듣는 게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 개인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공부뿐만이 아니다. 동급생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점은 드러났다. 스스로 하기 버거운 숙제를 받으면 주위 학우들을 들들 볶았다. '나한테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 그럼 내가 집에 가서 한번 해볼게'. 급우들이라고 매번 친절하게 알려주는 건 아니다. 본인들 사는 것이 버거울 때면 하늘 씨에게 면박을 줄 때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늘 씨는 굴하지 않는다. 기어코 방법을 듣고야 만다. 한번 들어서 기억을 못 하면 손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해결한다. 사실 숙제를 틀리게 해올 때도 적지 않았으나,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완성해 봤다는 자체가 갸륵했다.


이런 굳은 성정을 가진 덕분인지, 하늘 씨는 고령에도 우리 중에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늦가을쯤, 팔에 깁스를 하고 오셨다. 의례 '날이 추워지니 어르신들 골절상이 많아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하늘 씨는 이웃에게 김장김치를 담아 나눠드리는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무거운 짐을 옮기다가 팔을 다치셨다는데, 대체 그 연세에 저런 활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우리 야학뿐 아니라 낮에 복지관에서 다른 것도 공부한다고 하시는데, 거기서도 꽤 인싸라고 소문이 났다.


'방법을 가르쳐주면 내가 직접 해보겠다'라고 하시는 분이 한 분 더 계신다. 우리 학생들의 워너비인 한글반 선생님! 12년쯤 전에 우리 야학을 졸업하셨고, 기세를 몰아 대학교 학사모까지 쓰셨다. 그리고 선생님 자격으로 야학에 돌아오셔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중이시다. 한글 선생님은 당시 이미 70대 중반이셨고, 당연히 컴퓨터 사용은 거의 불가능하셨다. 코로나 창궐 당시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을 때, 선생님께 '이제 컴퓨터로 수업해야 해서, 선생님께서는 당분간 수업을 쉬시는 게 어떨까요? 비대면으로 강의를 하는 게 선생님께는 버거울 것 같아요.'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수학 선생님은 '언제까지나 수업을 쉴 수는 없잖아요. 이번 주만 수업을 쉬고 컴퓨터 사용법을 배울게요. 저한테 사용 방법을 가르쳐주세요!'라고 의외의 부탁을 하셨다. 들어보니 나한테만 컴퓨터 사용법을 배운 게 아니라, 꽤 여러 분께 부탁을 했더라. 젊은 선생님들은 어디서부터 알려드려야 할지 난처했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뚝딱거리셨지만 2~3주 만에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적극성이 있어야만 검정고시 합격과 대학교 졸업, 그리고 본인의 후배를 직접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연달아 할 수 있나 보다.


누구든 못하는 게 있다. 결점을 마주한들 그저 눈 질끈 감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아마 나처럼 허접한 핑계들을 대며 운전대를 잡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배울 자세를 갖추는 건 어렵다. 잘하지 못하기에 재미가 없고, 남들에게 시선이 무섭다. 하늘 씨는 적어도 우리 반에서 가장 용기 있는 학생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약점을 마주할 만큼 대담했다. 나는 어떤가. 놀림 받을 준비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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