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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운동이 필요해

by 김룰루

눈이 푹푹 나렸다. 이런 로맨틱한 날, 눈처럼 뽀얀 막걸리가 당겼다. 수업 후 그냥 집에가긴 아쉬워 선생님 J와 전집으로 향했다. 말재주가 좋은 선생님 J는 공통 관심사가 없는 사이에도 잘도 이야기를 나눠주는 재능이 있다. 친구가 많을 것 같은 성격인데, 정작 그는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그의 본캐는 CEO이다. 데리고 있는 직원은 백 명이 넘는다. 업계 돈줄을 쥔 큰손들을 봬야 하는 조찬미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보고와 회의에 들어간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어느덧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 같은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에 간 선생님 J. 식당 아주머니가 어렵게 입을 뗀다.


"사장님, 죄송한데 점심 드시러는 한산한 시간에 와주시면 안 될까요? 사장님이 식사를 하고 계시면 직원들이 불편해서 저희 가게에 안 와요."


아무도 없을 때 몰래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사람. 선생님 J의 사업이 흥할수록 그는 외로워진다. 그가 인생의 고단함을 달래는 방법은 화장실에 숨어 들어가는 것. 변기칸에 박혀서 몰래 전자담배를 뻐끔거리며 잠깐의 휴식을 갖는다. 사장 체면에 길빵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화장실 흡연은 불법입니다.


그런 그에게 야학은 오아시스다. 가끔씩 버거운 그의 사회적 위치를 잊을 수 있는 곳. 계급장 다 떼고 교실에 들어온 그는 아이처럼 반짝반짝 놀기 시작한다. 교실 앞뒤를 오가며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고, 그날 공부해야 할 영어 단어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소리 내어 웃는다.


"저는 말하려고 야학에 와요. 아시다시피 제가 말이 많잖아요. 그런데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회사에서 제가 말 많이 하면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제 아내는 내향적이라 제가 말을 듣고 있자면 머리가 아프다네요.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집중해서 제 얘기를 들어줘요. 그것도 한 시간 내내 숨죽이고. 행여나 집중 안될까 봐 애를 쓰면서 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데,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아마 이 반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그일 테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 순간만큼은 이 분이 가장 즐거워 보인다.




나라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봉사활동을 하는 건 아니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였다. 많은 회사에 서류를 넣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매주 야학에 가면서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공부를 해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은데, 하물며 봉사활동이라니.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돕는다는 건가. 이미 야학 3년 차였으므로 가르치는 데는 익숙했다. 그래도 '취직에 모든 기운을 써야 하지 않겠어? 나중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걸 후회하면 어떡하려고'라는 불안은 없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졸업이라도 안 했었지, 당시 동료 선생님은 임용고시 삼수생이었다. 감히 그에게는 우는 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나보다 훨씬 절박한 사람 앞에서 어찌 신세한탄을 할 수 있겠는가. 둘이 밥을 먹으면 웃음으로 시작해 작은 한숨으로 끝이 났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5시간 전에 야학 문을 열었다. 거기서 토익 공부를 했다. 학교 동기들은 이미 졸업했거나 휴학 중이었기에 이미 학교는 내 것이 아닌 듯 어색했다. 인적 없는 조용한 야학이 가장 편한 장소였다. 책상 있고, 컴퓨터 있고, 정수기 있고, 프린터도 있잖아? 독서실을 전세 낸 것처럼 이용하니 취업 준비하기에는 딱이었다.


그날도 늘지 않는 토익을 부여잡고 있었다. 수업 한 시간 전쯤, 혜교씨가 등교했다. 혜교씨는 우리 반에서 가장 순한 학생이었다. 연예인으로 치면 '거침없이 하이킥' 서민정 배우가 작중으로부터 20년쯤 나이를 먹은 모습이 혜교씨와 가까울 것 같다. 말도 조심조심, 선생님 알기를 정말 하늘같이 아시는 분이셨다. 그녀는 내 그림자도 밟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라도 선생님이 보이면 꼭 달려가서 인사를 하셨다. 선생님에게 달려가다 넘어지셨던 기억이 난다.(이 점도 서민정과...) 그렇게 겸손한 혜교씨는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다. 검정고시를 빠르게 마치기에는 이해력과 암기력이 부족했다.


"혜교씨~ 일찍 오셨네요. 복습하려고 미리 오셨어요?"


혜교씨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우라질 영어 단어집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머릿속에 단어가 착착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혜교씨, 공부는 잘 되세요? 영어단어 참 안 외워지죠? 저도 영어가 약하거든요. 본격적으로 취직 준비를 하려면 토익을 어서 끝내야 하는데 영어가 발목을 잡네요."


무심코 내가 뱉은 자조 섞인 투정에 혜교 씨는 걱정을 가득 담아 말씀하셨다.


"아이고, 선생님 요즘 스트레스 많으세요? 너무 스트레스받으면 될 것도 안되는데 어쩌지. 저를 보세요. 멍청한 나 같은 사람도 포기 안 하잖아요. 우리 선생님은 저보다 훨씬 똑똑하니깐 당연히 해낼 수 있어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난 손에 물 안 묻히고 그저 공부만 하면 되는 도련님이고, 혜교씨는 없는 시간 짬을 내서 공부하려고 애를 쓰는 슈퍼맘인데. 공부는 나에게 그저 십수 년 동안 계속해왔던 일이고, 그녀에게는 평생 처음 해보는 낯선 무언가일 텐데. 내가 그녀를 응원해도 모자랄 판에, 가뜩이나 선생님들에게 진심인 그녀에게 불필요한 걱정까지 얹어주었으니.


그 뒤로도 종종 그녀의 말을 곱씹어야 했다. 공부가 잘 되지 않을 때, 면접을 망칠까 봐 불안할 때, 이 길이 맞는 길인가 갈등이 될 때. 그럴 때마다 혜교씨의 응원을 떠올렸다. 그녀의 밑도 끝도 없던 위로가 주술처럼 내 정신줄을 붙잡아 주었다. 우리 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게을러지면 안 된다고 마음을 먹었다.




"저도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당신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냥 지금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주변에 있는 기관에 상담이라도 신청해 보아라. 자신의 과업을 더 잘하게 만들어 줄 테니깐. 나에게 야학 활동은 마음의 운동이다. 운동을 하면 당연히 힘이 든다. 하지만 반복하면 체력이 키워진다. 시간을 써야 하겠지만, 그 시간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다. 이곳에서 선생님 J는 외로움을 달래고, 나는 슬럼프를 이겨냈다.


교사지원서를 보면 '저는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여생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살고 싶습니다'라는 지원동기를 심심찮게 본다. 그 지원자들의 선의가 무척 감사하지만, 그리고 실제 그렇게 본인의 지식을 나누며 노후를 보내시는 분들도 우리 야학에 계시지만,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많은 선생님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개인적인 의견인데, 여생보다는 현생을 더 치열하게 보내야 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교사도 야학에서 얻는 게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는데, 아무래도 후자에게 우리 야학이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일주일에 두 시간을 봉사활동에 내어준다면, 대신 시간으로 살 수 없는 단단한 심지를 받을 수 있다.



선생님 J의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다. 혜교씨는 얼마 안 있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졸업했다. 임용고시 삼수생이었던 선생님은 현재 세종시 지리교사로 재직 중이다. 나는 원하는 토익점수를 따냈고, 마침내 토익점수를 요구하지 않는 회사에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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