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로부터 멀어지기
이십몇 년 간을 살던 홈 그라운드를 벗어나 한 번도 기대한 적 없었던 이탈리아라는 나라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는 무언가에서의 해방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나 처음 보는 화려한 대리석 조각상들이 즐비한 건물들을 보며 느낀 강렬한 이국적인 끌림이 나의 결정에 엑셀을 가하기도 했을 것이다. 문화권을 옮긴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고민 혹은 조사 따위 없이 그렇게 이탈리아로 넘어왔다.
이전에 수많은 여행을 하며 짧게는 3일, 길게는 2주라는 잠깐씩의 해방과 낯선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경험은 그 전에 비해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비교적 긴 1년이라는 시간을 이탈리아에 살아보기를 결정하면서는 어떠한 장대한 목표보다는 그 해방의 순간을 더 길게 느끼기 위함이었지 싶다.
언어든 문화든 사람이든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만나보지 못했을 순간들에 가감 없이 나를 던져 놓았다.
그런데 그래도 나는 한국인이었다. 사방의 온갖 낯선 것들이 익숙해질 때쯤엔 세상으로 향하던 관심이 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 몸은 이탈리아에 있지만 사고하는 방식은 한국에 아직 머물러 있었고 어느 순간 내가 겪었던 해방들은 가짜 해방처럼 느껴졌다.
이런 저런 말들에 떠밀려 표류하던 방식의 한국에서의 일상처럼 이곳에서도 여전히 기준을 밖에 두었다. 내가 싫은 것이 기준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수차례의 홀로 떠났던 여행들 뒤 나는 내 안의 이야기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행이 일상이 되자 그 사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다시 나 자신을 도마 위에 올린것이다.
간신히 좋아진 여드름이 다시 나빠지진 않을까, 지금 신은 구두가 발을 더 커 보이게 하진 않을까, 스물 후반에 어학연수를 해도 되는 걸까, 혹시나 이 옷이 촌스러워 보이진 않을까, 이렇게 먹다가 살이 찌면 어쩔까, 구두를 신으면 여자치곤 너무 커지겠지 하면서 나 자신을 기준 없는 기준에 맞추며 이리저리 뜯어보며 불만족하던 버릇 그대로 나는 나를 묶었다.
피렌체에서 어학원을 다녔을 때의 일이다.
수업 중간에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모두의 주제가 되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고민거리를 터놓기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여드름이 있어서 항상 피부를 가리고 싶다고 했더니 시모나 선생님은 말했다.
여드름 그게 뭐 어때서?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그게 뭐 좀 어떻다고 그게 그렇게 싫었을까?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내 여드름으로만 모인 것 같았던 시간이 있었다. 매일 보던 거울에서는 여드름만 보이고 지인을 만나면 너 피부 어쩌면 좋냐라고 이야기가 시작되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피부가 좋은 안 좋든 그럼 좀 어때?
어려서부터는 작은 발이 부러웠다. 커서는 가질 수 없음을 알자 이제는 발이 작아 ‘보이는’ 신발을 찾아다니고 디자인이 맘에 들어도 조금만 발이 커 보인다 싶으면 내려놓기 일쑤였다.
신발 쇼핑을 하다 종종 이 디자인으로 39 사이즈는 발이 너무 커 보일 거 같다며 내려놓는 나에게 로렌조는 말했다.
그게 네 사이즈야. 네 키엔 그게 정상이지 이상한 게 아니야. 맘에 들면 신어 봐. 발 커 보일 거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그러게, 발 큰게 무슨 상관이고 크다는 기준은 또 뭔데. 이게 정상이지 참.
학교마다 동네마다 다를지 모르겠지만 발 사이즈에 대한 여학생들의 집착은 중학생 때가 피크였다. 한창 성장기에 발 커지는 게 싫어서 일부러 작은 운동화를 신던 친구들 그리고 나. 그렇게 쭉 알게 모르게 내 발은 큰 거구 나하며 콤플렉스까지는 아니지만 긍정적이지 못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발 큰 여자는 싫다라는 소리를 들어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큰 발인 내가 이탈리아에 오니 흔해 빠진 사이즈였다. 특별할 게 없는 크기였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이탈리아에서도 사람 구경을 즐겨한다. 저렇게 색을 조합할 수도 있구나 싶은 멋쟁이 코디부터 저런 걸 입을 수도 있구나 싶은 코디까지 개성이 흘러넘치는 이탈리아의 길거리는 볼거리 천국이다. 평소 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사람 구경하길 즐겼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었다. 정말 입고 싶은 대로 입는구나!
사람들은 내가, 네가 무얼 입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든 간에 너와 나의 대화에서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다. 상황에 맞게 깔끔하게 잘 입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들 옷 다운 옷만 입으면 되는 것. 심지어 누가 브래지어를 했는지 안 했는지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스타일도 다양하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패션템부터 할머니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빈티지한 스타일, 한국 길거리에서는 보기 힘든 파티 복으로도 강렬할 것 같은 채도 높은 원피스 등 길거리에서 쉽게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일 처음 느낀 건 애들이 왜 학교에 그냥 오지? 였다. 학교에 그냥 오다의 기준은 화장 없는 얼굴에 특별할 것 없는 청바지, 때론 늘어난 트레이닝 복 그리고 등산 가방 같은 큰 백팩이었다. 여기에 감지 않은 머리도 추가한다.
소위 말하는 개강 런웨이가 없다. 몇백 명의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흔히 보던 명품 가방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꾸미고 오는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랄까.
학교나 학과의 특성마다 다르겠지만 이탈리아 국립대 문과 기준 개인적인 경험에서의 느낀 바이다. 학교 외 사적인 자리에서야 한껏 꾸민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꾸미지 않은들, 또한 그것이 최선이었던들 어떠한가. 옷 입고 등교해서 수업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일 텐데 말이다.
이제 나에게있어 화장이란 엄청 꾸민 날 기준으로는 피부에 파운데이션 조금 올리고 마스카라를 하는 정도가 되었고 많은 날들을 선크림과 립스틱, 그 정도만으로 채우고 있다. 여드름이 심해지면 피부 보호를 위해 선크림 정도만 바르고 있다. 컨실러라는 것을 안 산지도 약 5년이 넘어간다. 한국에서 사 온 파운데이션 팩트 한 통은 뜯기도 전에 다 굳어 휴지통으로 버려졌다. 결점을 가릴 성능 좋은 제품들의 후기를 보고 신상을 쫒는 게 취미였던 날들을 뒤로하고 필요에 의한 구매를 하게 된 지도 5년이 다 되어간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나는 왜 이리도 예전의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가만두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중심이 내 안에 없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어리기도 어렸고 그래서 들려오는 말들에 더 흔들렸었나 보다.
말들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건 요즘의 대한민국에서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남의 외모에 대해 말하거나 지적하는 행위는 그것이 농담일지라도 굉장히 실례라는 사실이다.
이제 곧 스물을 바라보던 스위스 여자 아이 C를 로마 어학원에서 만났다. 함께 소속된 그룹이 있었는데 여느 날처럼 평범하게 다 같이 아페리티보를 하고 있던 날 이 일이 일어났다.
저녁 식사 겸 술자리였기에 모두가 가벼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찰나, 갑자기 동양 어느 나라에서 온 남자아이가 (국적은 특정하지 않겠다) C에게 "넌 살을 좀 뺄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주변 친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작 말을 던진 아이는 잘못이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C는 빼빼 마른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이어트를 해야 될 스타일도 아니었다. 찰나였고 농담 식의 어투에 당사자는 웃고 넘겼지만 주변의 아이들이 정색을 하며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라고 부끄러운 줄 알라며 남자아이를 다그쳤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의 외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을까. 아름다운 것을 쫒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지만 굳이 남을 평가하는 말들을 밖으로 꺼내야만 하는 것인가. 설령 걱정이 담긴 의도였다 한들, 농담이었다 한들 어쩌다 그렇게 부끄럼 없이 뱉게 되었을까.
무조건 서로에게 좋은 말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걱정은 걱정으로 머물러 주기를, 화살로 만들어 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말은 휘발되지만 듣는 이의 안에서는 오랜 시간 머물기도 하니까.
더불어 지난날 나도 누군가에게 화살을 쏘진 않았을까 생각케한다. (만약 이 글을 보고 있는 이들 중, 제 화살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연락주세요 이야기해요)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는 내가 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먼저 외모 지적이 예의의 문제로 자리 잡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더 빠른 길이지 않을까.
내 우물을 나와야 비로소 내가 있던 우물이 보인다고 했다. 우물을 빠져 나왔기에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어떠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순간들대신 진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조금은 달라졌을까 싶다.
이탈리아 생활 6년 차가 된 지금에서야 그동안 나를 묶고 있던 벨트를 푼 듯 해방을 느끼며 이곳에서의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제법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도.
마르지 않았어도, 외모가 어떤 사람의 취향이 아니어도, 철 지난 옷을 입었대도, 웃음소리가 특이해도, 인생이 '일반적인' 카테고리 안에 들지 못한다 해도 다 괜찮다. 그 일반적인 삶이란 누가 정하는 것인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답고 다양한 자연의 색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는걸, 남들 다 가는 길을 걷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