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서 해돋이를 연상하면 독자들 대부분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떠올릴 것이다. 모네가 동료들과 첫 전시를 열었던 전시장에서 루이 르르와(Louis Leroy)라는 비평가가 조롱조로 "인상적!"이라고 외친 것이 계기가 돼 '인상파'라는 용어가 탄생했다는 사실 외에, 이 작품이 모네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렸다는 사실, 미술투자의 가장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다.
인상파의 첫 전시 당시 모네의 자화상(1874)
#1. 인생에서 힘든 순간, 고향에서 그린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1872년 11월 어느 날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과 센 강이 만나는 당시에는 무역의 중심지 항구로 번창하던 르 아브르(Le Havre) 항구를 찾았다. 기록에는 여행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 곳은 특별한 장소, 그가 유년 시절부터 고등학교시절까지 지냈던 고향이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간 전쟁이 프랑스의 패전으로 끝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엄습한 반면에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기운으로 항구가 약동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개인적으로 모네 자신에게도 역경과 희망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그는 1870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결혼하는 바람에 아버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전쟁의 여파로 영국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피사로와 만나 그림을 그리면서 여행을 다녔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1년전에 돌아가셨고, 여러 도시들은 폐허상태나 다름없었다. 그가 고향인 르 아브르를 찾았을 당시의 심정은, 아버지의 죽음과 전쟁의 상처로 인한 비참함, 미래에 작가로서 불안감이 깊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는 힘든 시기였다.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고향을 찾은 그는 호텔의 창문을 통해 해돋이를 바라보며 희망을 꿈꿨을 것이다. 재빠른 터치로 일출 장면을 포착해 여러 색깔의 물감을 사용할 시간도 없이 짙푸른 회색과 떠오른 태양을 주홍빛으로 표현하며 그림을 완성했다. 그가 인생의 기로에서 고향을 찾아와 유년 시절의 추억과 그 당시의 희망을 담아 호텔 창가에서 그린 그림이 바로 미술의 흐름을 바꾼 <인상, 해돋이>다.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48*63cm,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모네의 눈에 비친 르아브르 항구의 일출은 안개 낀 푸른 진회색의 바다 빛깔이었다. 왼쪽 미끄러져 가는 세 척의 노 젖는 배 사이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며 아침 해는 느리게 떠오르고 있다. 오른쪽 항구 부두에서는 크레인으로 화물을 선체에서 하역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분주한 증기선 너머의 공장 연기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증기선과 공장의 연기 그리고 노젓는 배의 느린 흐름, 과거를 상징하는 노젓는 배와 현재를 상징하는 증기선과 공장의 굴뚝 연기는 각각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한 공간에 녹아 있다. 인상파가 즐겨 쓰는 상상이 아닌, 현실의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빛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좌측 하단에 모네의 서명과 함께 72라는 숫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림을 그린 연도다. 일부에서는 이 그림이 그려진 연도가 1873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72라는 서명을 보면 1872년임을 정확히 알 수 있다. 2014년에 모네를 연구하던 일군의 전문가들이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그림이 그려진 정확한 날짜를 파악하기 위해 그림을 분석한 결과 였는데, 르 아브르(Le Havre) 항구의 기상 날씨 기록 중 그림에 나타난 아침 안개와 그림 속의 바람 방향 등을 토대로 이 그림이 1872년 11월 13일 그려졌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적 특징이 잘 나타난다. 아침 항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사진 그 자체는 아니다. 모네가 그림을 그렸던 호텔 창가에서 보면, 원래 왼쪽에는 눈에 거슬리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모네는 그 집을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인상파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는 표현하는 사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네에게 프랑스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참전을 피하기 위해 영국으로의 도피는 그에게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는 그의 작업에 눈을 띄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인기를 누리던 터너의 빛을 향한 작품들은 그가 빛의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윌리엄 터너, 일몰, 수채화, c. 1830-40
산업혁명으로 유발된 공기오염 상태의 안개는 빛의 관찰을 세심하게 표현했던 터너와 모네에게는 묘한 신비감과 사진이 표현하지 못하는 파스텔톤의 미적 장면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출,일몰 장면을 통해 가장 감정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그림에 담은 것이다.
클로드 모네, 런던 의회 안개사이로 뜨는 해, 1904 , 92*8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2. 전시장에서 인기를 끈 건 다른 작품이었다
흔히 모네를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평가의 배경에는 그가 인상주의를 이끈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인상, 해돋이> 작품을 통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폭제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상, 해돋이>는 그림이 완성된 후 2년이 지난 1874년 공식 살롱전과 독립적으로 주최한 제1회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전시된다.
당시 프랑스 사진작가로 유명한 나다르의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한 전시회에는 르느와르, 드가, 피사로 등 이후 인상파로 불리는 작가들 뿐 아니라 조각가 등도 참여했다. 이들은 나중에 단체를 결성했는데, 화가, 조각가, 인쇄업자 등의 ‘익명협회’라고 불렸다. 30명의 작가가 모두 165점의 작품을 출품했고, 입장료가 있는 유료 전시였다.
당시의 전시포스터(좌) 전시가 개최됐던 나다르 스튜디오(우)
전시는 1874년 4월 15일~5월 15일까지 당시 파리 카푸신(capucines) 대로의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입장료는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는 50 쌍팀(centimes), 아침 조조인 오전 8시 입장부터, 야간 저녁 10시까지는 1프랑이었다. 조조와 야간 입장료를 할증해 받았다는 사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흥미롭다.
전시장 내부도 여느 전시장과는 배치가 달랐다. 당시의 파리 기성 화단을 벗어난 전위 예술가들의 전시인 만큼 작품의 배치가 민주적이었다. 심지어 작품들이 공정하게 배치될 수 있도록 규약을 정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젊고 덜 알려진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맨 위에 두었다. 작품을 여러 층으로 걸지 않고, 두 줄로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작은 그림은 아래에, 큰 그림은 위에 배치해 관람객들의 편의를 배려했다.
전시회의 리뷰에서 '인상, 해돋이'는 조롱 대상이 되어 유명해졌지만, 전시 기간 주목받은 모네의 작품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바로 카푸신(capucines) 대로를 그린 그림이었다.
모네의 작품 <capucines 대로>는 인상파의 첫 전시가 열렸던 나다르의 스튜디오가 있는 파리의 번화가대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많은 거리의 사람들과 생기 넘치는 capucines 대로는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인기 있는 소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그림이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네의 카푸신대로(Boulevard des Capucines) 그림이다. 모네는 이 그림의 판매가를 1000프랑으로 책정했지만 팔리기는 800프랑에 팔렸다고 한다.
모네,카푸신대로,1873
#3. 가장 성공한 미술품 투자가 된 <인상, 해돋이>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1874년 인상파의 첫 전시회가 끝난 후, 열렬한 후원자이며 당시의 파리 백화점을 경영하던 에른스트 호세데(Ernest hoschede)에게 800프랑에 판매됐다. 당시 파리의 의사나 변호사 연간수입이 9천 프랑 내외였다고 하니, 이 작품의 판매가는 변호사나 의사의 한 달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러나 구매자였던 백화점 주인 호세데는 그림을 구매한지 몇 년 후 파산했다. 압류됐던 <인상, 해돋이>는 경매를 거쳐 1878년 고작 210프랑에 팔렸다.
이때 구매자는 조르주 벨리오 박사였다. 이 그림은 그가 사망한 1894년 그의 딸이 물려받아 1940년 파리의 흔히 '모네미술관'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Musée Marmottan Monet)에 기증됐다.
실물크기는 48*63cm A4용지 두장 정도의 작은 그림이다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작품의 가격은 얼마일까?
<인상, 해돋이>는 지난 1985년 10월 27일 모네미술관에 침입한 권총강도 손에 도난당했으나, 1991년 12월 5일 코르시카에서 발견돼 다시 미술관에 돌아왔다.
그 화제성이 더해지면서 다른 인상파의 그림까지 가격이 치솟았다. 2019년 5월 소더비 경매에서는 모네의 <건초더미>그림이 1억1천여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이 2012년 2월 경매에 나와서 2억5천여만 달러에 거래돼 화제가 되었다.
전문가들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대해 미술사적 중요성과 명성을 고려해 3억 달러(한화 4000억 원) 내외로 가격을 추정한다. 1874년 최초 전시 때 800 프랑에 팔렸고 경매후 210 프랑에 다시 팔린 그림의 현재 가격이 4000억 원 내외로 추정되고 있으니, 미술품 투자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투자 미술품인 것이다.
그러나 <인상, 해돋이>는 경제적인 가치 이상으로 미술투자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기증'이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컬렉터들은 대개 좋아하는 그림들을 소수가 즐기려고 구입하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베블런 효과'이다. 남들이 쉽게 갖지 못하는 물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일종의 과시욕을 말한다.
그러나 <인상, 해돋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적가치에 대한 공감을 기증을 통해 실천함으로써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더욱 우리 곁에 명화로 남아있다.
※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 :
마르모탕(Marmottan) 가문의 기증에 의해 1934 설립된 규모가 작은 파리의 미술관이다.
미술관 내부는 다른 미술관과는 다르게 관람객을 위한 장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벽을 따라 길게 전시된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면서 관람객이 명상에 잠길 수 있는 분위기가 제공되는 특별한 미술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