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음식 이야기 — 오이소박이
처음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그저 기억의 서랍을 열었을 뿐인데, 어느새 서른 번째이다.
그 안에는 계절마다 다른 향을 품은 음식들이 차곡히 쌓여 있다. 호박지의 묵직한 구수함, 팥시루떡의 붉고 따뜻한 빛, 손두부를 누르던 차가운 돌의 질감, 열무김치의 풋풋함, 막걸리 술빵의 은은한 맛…….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손맛이다.
지난 주말, 30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봉담의 한적한 마을에 터를 잡은 친구 순이의 집을 찾았다. 우리는 한때 인형극 봉사를 3년 동안 함께하던 동갑내기다. 세월은 우리를 조금씩 다른 자리로 데려다 놓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같은 시간의 온기가 남아 있다. 순이의 집은 어린 시절 고향 집의 햇볕처럼 따뜻했다. 봄나물과 손수 지은 상추, 된장찌개로 차린 점심은 어머니의 손맛을 닮았다.
돌아오는 길, 순이는 수확한 오이와 방울토마토, 오가피 순, 상추, 부추, 머위장아찌를 상자에 담아 차에 가득 실어주었다. 친정에서 돌아가는 딸에게 건네듯.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을 마주 잡은 채, 그냥 건강하기를 빌었다.
집에 돌아와 농장에서 얻어온 씀바귀와 머위, 망초를 다듬으며, 오이소박이를 만든다.
굵은 천일염을 손에 쥐고 오이를 돌려가며 문질러 준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오돌토돌한 감촉, 소금이 껍질의 거친 결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서걱거린다. 깨끗이 씻어낸 오이에 열십자 칼집을 낸다. 끝까지 자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를 넣을 작은 방을 만든다. 팔팔 끓인 소금물을 오이 위에 부으면 천천히 뜨거운 물을 마시며 숨을 죽인다. 삼십 분 정도. 뜨거운 소금물을 한 번 통과시켜야 마지막 한 개 먹을 때까지 아삭 거림이 살아남는다. 채반에 건지면 오이는 연초록빛을 더욱 선명하게 띠며 투명하게 빛난다.
그사이 양념을 준비한다. 부추 반 단과 대파 흰 부분, 양파를 2cm 길이로 굵직하게 썬다. 잘게 썰면 나중에 양념만 남아 지저분하다. 굵어야 소를 채울 때 모양이 살고, 씹히는 식감이 다르다. 남은 부추 반 단은 따로 두었다가 마지막에 뚜껑처럼 덮을 우거지로 쓴다.
양념- 다진 마늘 한 숟가락, 생강청 한 작은 술, 새우젓 한 숟가락, 멸치액젓 두 숟가락, 고춧가루 한 컵, 설탕 두 숟가락. 찹쌀죽이나 밥을 갈아 넣으면 감칠맛이 깊어진다. 재료들을 한데 모아 조물조물하면 짭조름하면서도 달큼한 양념이 완성된다. 오이 향이 부엌에 번지는 순간, 밥 한 그릇을 가져와 그냥 비벼 먹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래도 꿀맛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양념은 조금 짠 듯해야 한다. 오이 속에 채워지고 나면 간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싱거운 양념으로 만든 오이소박이는 끝내 짐짐하다. 조금 짜다 싶을 때, 그때가 딱 맞다.
절인 오이의 칼집 사이사이에 양념소를 꼼꼼히 밀어 넣는다. 손가락으로 눌러 넣을 때마다 고춧가루의 붉은빛이 초록 사이로 번진다. 소를 채운 오이들을 차곡차곡 통에 담고, 남겨둔 부추를 양념에 버무려 그 위를 덮어주면 완성이다.
어머니는 늘 부뚜막의 돌확에 새우젓과 마늘을 직접 갈아 양념을 만들었다. 절구 소리는 부엌에 낮게 깔리다가 저녁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우리는 밥상 앞에 앉아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겨우내 묵은 김치에 지쳐갈 즈음, 입안에서 아삭 터지는 오이 한 입은 계절의 입구였다. 그 시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밥상은 따뜻했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넉넉했다.
일제강점기의 서슬 퍼런 세월을 지나고 한국전쟁의 잿더미를 걸어온 어머니는, 육 남매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기 위해 두 손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 손에서 버무린 음식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시절의 허기를 달래는 조용한 위로였다.
이 연재는 어쩌면 그 마음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긴 순례였다. 아직 다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처럼, 어머니의 음식들이 여전히 기억 어딘가에 고여 있다. 먼 훗날, 아이들이 밥상 앞에 앉아 문득 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그리움이 손을 움직여 부엌으로 이끌고, 철 따라 나오는 식재료 앞에서 나물을 다듬는 정겨운 오후가 되기를. 이 작은 기록이 그때 펼쳐볼 낡은 레시피 한 장이 되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봄은 해마다 돌아온다. 어머니의 봄나물도, 기억의 형태로 해마다 봄을 데려온다.
그동안 서른 번의 음식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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