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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글쓰기

오월의 향기

by 수련

풀잎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숲 속의 녹음은 더 짙어졌고, 나뭇잎은 말끔하게 씻겨 방금 세수한 얼굴로 반짝인다. 상담사 일곱 명이 함께 떠난 단합 대회 겸 봄 소풍, 자연과 함께 바람을 쐬려는 이상의 의미였다. 나이 들어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마치 오래된 나무에 새순이 돋는 일처럼 더디지만, 은근한 따뜻함이 있다.


오산대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 발아래에 핀 작은 꽃들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행렬은 마치 흩날리던 꽃잎들이 강물 따라 흐르는 듯, 조용히 하나로 모였다.


물향기수목원

이름처럼 그곳은 식물보다 향기가 먼저 다가왔다. 전날에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진 비는 숲의 미세먼지를 씻고, 나뭇잎마다 맑은 물방울을 걸어놓았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가 폐 깊숙이 머물고 콧구멍이 벌름벌름 킁킁거릴 때, 나무가 숨 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 향은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는 공기청정기 같고, 오래 묵은 외로움 하나가 나뭇잎에 걸려 나를 스쳐 가는 느낌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곳곳에서 휠체어를 밀며 밝게 웃는 손, 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은 노인들의 발걸음, 장애와 연령을 초월한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가 함께 피워낸 한 떨기 꽃이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이 어울림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공존’의 향기이다. 아기와 엄마가 방긋 마주 웃는 모습, 젊은 연인들의 수줍은 속삭임, 화려한 의상으로 시선을 끌며 콘텐츠를 영상으로 만드는 크리에이터 등 수목원에는 다양한 캐릭터들로 빛나지만 ‘함께’라는 단어를 눈앞에 그렸다. 꽃은 저마다 예쁜 빛깔로 피어있고, 나무는 각자의 속도로 자란다. 사람도 나름의 모습대로 하루하루 성장하며 삶을 살아간다.


숲 속의 향기에 취하여 두 시간을 정신없이 걸어 다니다 잠시 휴식을 위해 그늘진 나무 의자에 앉는다. 어린 시절의 뒷산에서 밀려오던 아카시아 꽃향기가 문득 코끝에 닿았다. 그 은은한 향은 한 장의 사진처럼, 시골집 언덕길과 어머니의 손길을 불러온다.


초봄이면 어머니는 진달래 꽃잎을 찹쌀 반죽 위에 얹어 화전을 만들어 주셨고, 5월이 오면 뒷산.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을 따오라고 바구니를 내주셨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을 따라 오빠와 산길을 오른다. 찔레꽃 넝쿨 앞 꽃이 피기 전 죽순처럼 바닥에서 올라온 초록의 통통한 줄기를 오빠는 동생에게 꺾어준다. 작은 가시를 조심하며 껍질을 벗겨 먹으면 아삭하면서 달콤한 맛이 난다. 찔레꽃줄기와 칡 순의 줄기를 오물거리며 산길을 걸어간다.


오빠가 아카시아나무 가지를 잡아 내려주면 달고 부드러운 꽃송이를 따서 먹기도 하고 바구니 가득 담는다. 어머니는 아카시아꽃을 물에 살살 흔들어 씻은 후 체에 밭쳐 물기를 빼고, 튀김옷으로 찹쌀가루와 물을 섞어 반죽한 후 꽃을 반죽에 가볍게 묻힌 뒤, 무쇠솥의 기름에 빠삭하게 튀겨주셨다. 튀김옷을 얇게 입은 튀김은 꽃향기가 은은하게 살아나며 달콤했다. 5월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꽃 튀김이다.


시루떡을 만들기도 했다. 쌀가루에 시나당과 소금을 살짝 넣고, 체에 곱게 쳐놓고 씻어 물기를 뺀 아카시아꽃을 무시루떡을 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시루에 면포를 깔고, 쌀가루 → 꽃 → 쌀가루 → 꽃 순으로 켜켜이 얹고 김이 오른 시루에 넣고 30분 정도 찐다.


모내기하는 날 어머니는 새참으로 향긋한 떡과 나박 김치한통을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나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엄마 뒤를 따라 논둑으로 간다. 논둑에 둘러앉아 먹는 달콤한 떡 한 조각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입안을 맴돈다.


숲 속의 나무에서 흩날리던 아카시아 꽃잎은 눈처럼 내려, 우리의 걸음 길 위에 하얀 융단을 깔았다. 그 길을 걷는 우리는 모두 꽃길을 걷는 행운을 만끽했다. 지나온 날들이 고단하고 서러워도, 오늘 하루는 분명 삶이 건네준 한 송이 꽃이었다.


고향 뒷산, 어머니의 꽃 떡, 아이의 천진스러운 웃음, 까까머리 동창생이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모습으로 그 시절 얘기를 하는 모습까지, 지금, 이 순간의 바람까지. 풀꽃과 나무, 그리고 사람 사이를 걷는 5월의 향기로운 봄날 함께하는 상생의 동행이다.


나무 한그루가 말을 걸어왔다. 기둥이 굵은 오래된 붉은 꽃의 아까시나무였다. 흔히 보던 하얀 꽃 아카시아와는 다르게,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누구보다 단단한 마음으로 제 몫의 계절을 건너온 듯하다. 사람 사이의 인연도 나무처럼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꽃처럼 계절마다 조용히 피어나는 것으로 시절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다.


숲 속의 휴게공간 간식으로 가져온 초콜릿, 하루 견과, 참외 한 조각, 원두커피를 나누며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들. ‘상담사’라는 이름으로 만났지만, 이날만큼은 한 방향을 걷는 동행이었다. 말없이 등을 다독이고, 웃음 너머에 깃든 슬픔을 함께 들어주었다. 삶이란 결국, 이런 작고 다정한 순간들이 이어 붙여 만들어 가는 숲이 아닐까.

붉은 꽃 아까시나무
아카시아 꽃
아카시아 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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