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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음식 이야기

여름의 매운맛

by 수련

보드랍던 봄 햇살이 점점 억세지고, 나뭇잎은 지나가는 바람에도 지친 기색으로 녹색이 짙어진다. 이른 여름더위에 지친 가족들 입맛도 살릴 겸 주말 점심은 매콤 달콤 비빔국수이다.


입맛을 돋우기 위한 비빔 양념장은 고추장에 고춧가루, 식초, 고추냉이, 다진 마늘과 매실청을 넣고 새콤달콤하게 양념장을 만들어 2~3일 숙성하면 감칠맛이 더 풍미를 더한다. 딸은 나이가 서른 살이 넘었지만, 어린 시절 맛있게 먹은 간장 국수를 기억하며 간장 국수를 주문한다. 각자의 취향대로 매콤한 비빔국수와 달콤한 간장 국수를 먹으며 어린 시절의 즐겨 먹던 그날을 기억한다.


대나무로 병풍을 친 산밑의 시골집, 유년 시절 어머니는 더운 여름이면 점심으로 국수를 삶으셨다. 삼복더위에 오빠들이 안마당에서 등목을 하며 시끌벅적할 때, 어머니가 끓이던 그 무쇠솥의 뜨거움으로 땀을 흘리며 고생하셨을 엄마의 고단함을 누구도 헤아린 적이 없다. 결혼한 이후 매년 여름이 되어서야 그 국수의 의미를 떠올리곤 한다.


국수는 뽀얀 수증기를 뿜으며 삶아졌다. 끓는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 면발은 말수 적은 어머니의 하루 같다. 부엌 구석에 놓인 낡은 솥, 물이 끓는 소리는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이 쪼그라들다 다시 펴지는 소리 같다. 어머니의 뒤통수는 늘 수건을 동여매고 그 앞에서 묵묵했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여름이면 더 또렷이. 멀리서도 보이는 마을의 가로등처럼. 어머니는 국수를 삶을 때마다 땀을 흘리며 일상의 고단함을 덜어내셨다. 육체의 피로든, 마음의 무거움이든. 그릇에 담긴 건 국수가 아니라 가족의 빈속을 채우는 따뜻한 사랑이고 다정한 위로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십 리 길 읍내시장의 끝자락 국수 가게까지 걸었다. 마당 가득 긴 막대기마다 널려있는 기다란 면발은 마치 아기 기저귀를 삶아 펼쳐놓은 빨래처럼 바람 따라 일렁거렸다. 시장의 국숫집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직접 국수를 뽑는다. 마당에 길게 늘어놓아 자연건조를 통해 쫄깃하고 부드러운 면발을 만들었다. 국수는 요즘 판매하는 소면이 아니고 중간 면으로 국물국수나 비빔요리등 다양한 국수 요리를 할 수 있었다.


누런 띠지를 두른 국수 두 타래는 어머니 손에서 점심으로 끼니를 채우고 때로는 위로가 되었고, 식구들의 대화가 되었다. 시장에서 사 온 국수 뭉치를 부뚜막에 놓고 무쇠솥에 물이 끓으면 소금을 조금 넣고 국수를 넣어 쫄깃하게 삶는다. 찬물에 여러 번 헹구어 전분기를 씻어내고 꼬들꼬들하게 물기를 뺀다.


어른 국수에는 매콤한 고추장 양념이 얹혔고, 아이들 몫에는 집 간장과 설탕, 직접 짠 참기름으로 달콤함과 고소함을 추가했다. 어머니는 손바닥 끝으로 볶은 참깨를 비비며 고소함을 듬뿍 넣으셨다. 그 맛은 유년의 여름날이면 먹은 간장 국수의 달고 짭조름한 추억이다. 어린 시절 들과 산으로 누렁이와 뛰어다니며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국수 먹으라는 어머니의 부름에 툭툭 털고 일어났던 그리움이 마음속에 눌어붙었다.


이맘때 모내기가 한창이면 어머니는 더 많은 국수를 삶아야 했다. 새참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나간다. 어머니의 함지박에는 국수 대접과 양념장을 챙기고 그날의 햇살과 논물 냄새, 그리고 일꾼들 배를 채울 수 있는 국수사리가 대바구니에 동글동글 말려 하얀 천으로 덮여있다. 모내기를 하다 논에서 나온 분들이 큰 길가 느티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한숨을 돌리는 사이 어머니는 스테인리스 양푼에 국수를 풀어놓고 고추장 양념 소스로 버무려 각자의 국수 그릇에 반질반질하게 윤기 나는 국수를 소담스럽게 담고 열무김치와 오이를 고명으로 얹어주었다.


곁들여 먹을 국물로는 겨울에 담은 무짠지를 하루 전날 채 쳐서 찬물에 담가 준비한다. 쪽파를 송송 썰어 넣고 깨소금을 넣어 만든 무짠지 냉국이다. 짭조름하면서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해 주는 맛에 먹는 음식이다. 무짠지에 들어있는 천연소화제 다이아스테이스 성분이 소화 기능을 도와 위와 장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모내기하는 날 새참으로 내놓는 빨간 맛 국수는 특별하다. 모판을 옮기고 논에 모를 심느라 허리를 숙이고 펴기를 반복하는 일꾼들의 지친 몸에, 새콤달콤 매운맛의 3단 콤보로 기력을 북돋아준다. 벼농사의 시작인 모내기를 잘해야 가을 황금색 들판의 풍년을 기약한다. 어머니는 국수 위에 얹힌 오이채 하나, 열무김치 한 조각조차 허투루 하지 않고 얌전하게 올리셨다. 요즘은 달걀 반숙을 노랗게 올리지만, 그때는 달걀조차 귀한 시절이라 달걀은 올리지 못하고 고소한 참깨와 정성을 들였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고, 요즘 들기름 국수가 유행이라 했다. 어려서 먹은 음식이 유명하다고 해서 딸과 고기리 국수 맛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신세대들도 담백한 옛맛을 찾는 이가 많아서인지 요즘말로 오픈런을 해야 하고 4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어린 시절 추억의 감정을 들기름국수를 통해 먹었다.


요즘은 국수의 포장지조차 다양하고 예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국수를 보면 어머니의 무명 앞치마와 마당 끝 무쇠솥을 떠올린다. 시장 끝자락에서 사 오던 누런 띠를 두른 국수 다발, 그 안에는 들풀 냄새가 배어 있고, 식구들의 여름이 들어 있다. 여름날 안마당 멍석 위에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먹던 삶의 일부였다. 한 그릇의 국수가 성장기 허기를 채우고, 계절의 경계를 넘겨주는 다리가 되었던 시절, 그 유년기의 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맛이 그리워진다. 여름날 비빔국수를 먹고 나면 배보다 마음이 먼저 든든하던 이유….







비빔국수 조리법


재료: 소면국수 2인분, 오이반 개, 열무김치, 삶은 계란 1개

양념: 고추장 2큰술, 고춧가루 1큰술, 식초 4큰술, 매실청 3큰술, 설탕 1큰술, 간장 2작은술, 청양고추 1개

다진 마늘 조금, 고추냉이 조금, 참기름, 깨소금


- 소면을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5분 정도 삶아준 후 여러 번 헹구어 전분기를 빼주고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준다.

- 싱싱한 오이는 채치고 열무김치를 준비한다.

- 양념을 모두 섞어 양념장을 만들어 하루 정도 냉장숙성시킨다.

- 큰 볼에 국수와 양념을 골고루 비벼주고 참기름을 두른다.

그릇에 국수를 담고 고명으로 열무김치와 오이 달걀반쪽을 담고 마지막 깨소금을 뿌려준다.

(고명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방울토마토, 사과, 상추, 파프리카등 취향에 맞게 올린다)

매콤 비빔국수


간장 비빔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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