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열무김치
나뭇잎은 녹색으로 짙어지고 철쭉이 여기저기 꽃동산을 만드는 요즘 운동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산책로를 지나 동네 길목에 접어들 무렵, 시끌벅적한 소리와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큰 길가에 낯선 푸성귀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다. 가게는 조그맣고 인도에 채소와 과일 등 많은 것들을 늘어놓고, 야단법석이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행인을 멈춰 세울 정도로, 푸릇한 잎사귀들이 손짓하는 듯 어서 오라 속삭인다. 많은 사람이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겼다. 계산대에는 길게 줄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고물가에 경기도 좋지 않아 장사가 안된다고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울상인데 오랜만에 골목이 활기찬 모습이다. 개업한 채소 가게는 이마트나 아파트 단지 내 채소가게보다 파격세일한 가격에 인파가 많이 몰려 복잡하다.
요즘 모두 인터넷이라는 망 안에 갇혀서 편리하다는 덫에 익숙해진 생활. 그러나 그 안엔 계절의 냄새도, 시장의 생생한 활력과 삶의 현장도 없다. 장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여정 속에 사람 냄새를 되새기는 의식이었다는 것을, 나는 문득 잊고 있었다.
채소를 펼쳐놓은 노점은 마치 풀밭 위에 열린 연극 무대같이 싱그러운 열정이 있다. 손님을 향해 목청 높여 부르는 상인의 목소리는 바람 따라 멀리 번지고, 견물생심이라고 싱싱한 채소를 저렴하게 팔다 보니 주부들이 욕심을 내어 바구니에 가득 담는다. 주부 9단인 나도 "밭에서 바로 온 싱싱한 나를 가져가요"흔드는 손짓에 얼결에 열무 두 단과 얼갈이 한 단, 오이며 쪽파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가격이 저렴한 대신 배달은 안된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들고 가려니 괜한 욕심을 부렸나 살짝 후회스럽다. 손가락과 팔목이 저리는 무게 속에 손가락에 관절염이 심해지는 것은 아닌지 값싼 물건만이 아닌, 삶의 무게와 통증이 함께 느껴졌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집으로 향해 걸으며 생각한다. 편리함 속에 사라진 불편함이, 때론 삶의 충전이고 윤기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자, 신문지를 펼치고 열무 다발을 풀어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잎을 다듬으며 어린 날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산골의 봄날 김장김치가 거의 끝날 무렵 밥상은 언제나 엄마의 봄나물과 열무김치에서 시작됐다.
초봄에 검은 장화를 신은 아버지는 텃밭의 흙을 부드럽게 고른 후 밭고랑을 만들고, 씨앗을 담은 나무통을 등에 메고 고랑마다 종자를 골고루 뿌려준다. 훈훈한 동풍이 흙에 공기를 넣어주고 따스한 햇볕이 온기를 보내 싹을 틔우고 봄비가 촉촉하게 대지를 적셔주면 열무 모종이 수북하게 올라온다.
숨을 쉴 틈이 없이 빽빽하게 자라난 모종에서 어머니는 손가락만 한 여린 열무를 솎아낸다. 흐르는 물에 살살 씻은 어린순을 양푼 가득 담고 간장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양념에 살살 무쳐 겉절이를 밥상에 내놓는다. 밥 위에 얹어 참기름 한 방울 두르고 쓱쓱 비벼 먹던 그 맛은 봄나물처럼 쌉싸름하면서 부드러운 맛이었다. 요즘 말로 유기농 건강식 무순 샐러드이다.
한 달쯤 지나면 텃밭에는 손바닥만큼 자란 열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한 번 더 솎아 공간을 만들어 준다. 솎아낸 열무는 제법 열무다운 모습이다. 부드럽고 아삭한 열무로 김치를 담근다. 엄마는 붉은 건 고추와 마늘, 새우젓 한 숟갈을 돌절구에 넣고 찧으며 절구공이를 옆으로 돌리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형체가 없도록 곱게 갈았다. 밀가루 풀을 쑤어 풋내를 없애고 맑고 시원하게 정성스레 김치를 버무리셨다.
그 손길은 계절을 담아내는 마법 같았다. 봄부터 여름까지 온 가족이 그 김치에 고추장 한 숟갈을 넣고 비빔밥을 해 먹거나 열무김치 국물에 소면을 말아서 먹는 둥 다양하게 열무김치를 먹었다. 열무만 넣어서 담그는 일도 있지만, 얼갈이배추를 약간 섞어서 담가 먹기도 한다. 얼갈이배추의 아삭함이 식감을 더욱 기분 좋게 해 준다.
엄마의 손맛은 내가 결혼 후에도 봄이 되면 열무김치를 담가 택배로 보내주셨고, 가끔은 다니러 오셨을 때도 직접 김치를 담가주고 가시곤 했다. 엄마의 김치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양념이 진하지 않으며 맑은 국물은 새우젓의 연한 분홍색이고, 국물맛은 톡소는 청량감이 사이다를 먹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어린아이들도 맵지 않고 시원한 열무김치를 좋아하고 잘 먹었다.
열무는 일반배추보다 비타민 C 함량이 2배 이상 높고, 수분과 식이섬유가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몸속의 노폐물을 배출하고 장운동을 원활하게 한다. 성질이 차가운 채소로 체내 열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다. 더위에 지칠 때 열무김치 한 접시는 체온을 낮추고 갈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 나른한 봄과 더운 여름에 면역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열량이 낮고 포만감은 높아서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며 봄, 여름에 좋은 음식이다.
엄마의 조리법을 기억 속에서 되짚어, 조심스레 따라 해 본다. 믹서기 앞에 서면 절구의 소리가 들리는 듯 그립고, 스테인리스 함지박에 양념을 풀어놓으면 아궁이의 연기가 아른거린다. 절인 열무를 씻으며, 엄마의 주름진 손등 위로 흐르던 물방울이 떠오른다. 그 물방울은 단순한 노동의 땀이 아니라, 엄마의 따뜻한 사랑의 다른 모습이었나 보다.
모두 빠르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버튼 하나로 장보기가 끝나고, 새벽에 배달된 재료로 아침 식탁을 차린다. 하지만 그 속엔 손맛의 정성도 열무의 아삭함도, 김치가 익어가는 소리도 없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바쁜 시간 끼니를 때우는 건조함이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부엌은 아궁이 불을 지피며 여섯 아이 끼니를 정성 들여 준비했다. 검정 무쇠솥에 밥을 하면서 보라색 가지를 찌고 노랗고 말랑한 계란찜을 하는 둥 밥솥은 요술을 부리는 듯 아이들의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내셨다. 하루 세끼 밥을 짓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아이를 키우면서 어머니의 고단함을 이제야 조금 헤아릴 듯하다.
열무김치 담그는 법
재료: 열무 2단, 얼갈이배추 1단, 쪽파 반 단, 천일염 2컵, 물
- 열무와 얼갈이는 뿌리와 누렁 잎을 떼어내고 삼등분 정도 자른 후 물로 씻는다.
- 큰 함지박에 열무가 잠길 만큼 물을 넣고 굵은소금을 물에 살살 풀어주고 씻은 열무를 넣어 한 시간 소금물에 절여준다.
- 한두 번 위아래로 자리를 바꿔준다. (바로 굵은소금을 어린 채소에 뿌리면 연한 잎이 무르고 질겨짐)
양념: 양파 1개, 고춧가루 2컵, 마늘 2큰술, 생강 0.5큰술, 멸치액젓 1컵,
새우젓 2큰술, 매실청 반컵, 홍고추 5개, 청양고추 3개, 밀가루풀, 소금
- 물 3컵에 밀가루 3 숟갈 넣고 골고루 휘저어 끓고 나면 약한 불로 저어가며 밀가루 풀을 만들어 식혀둔다.
(밀가루 풀이 번거롭다면 남은 밥이나 찐 감자를 갈아 넣어도 감칠맛과 시원함이 배가되고 김치가
다 먹을 때까지 누르지 않는다.)
- 고춧가루를 멸치액젓, 밀가루 풀, 매실청에 버무려 불려놓고
- 홍고추, 양파, 청양고추, 새우젓, 생강, 마늘은 믹서기에 한꺼번에 갈아준다.
- 큰 양푼에 쪽파와 양념을 모두 섞어주고 양념이 빡빡하면 생수 2컵을 부어 섞어준다.
- 절여진 열무는 두 번 정도 물에 헹군 후 바구니에 받쳐 물기를 빼주고 양념에 골고루 버무려준다.
실온에서 하루 정도 익히고 냉장고에 삼일정도 숙성하면 아삭아삭 식감도 최고, 보리밥에 비벼 먹을 생각과
열무국수 만들어 먹을 생각에 부자가 된 듯 흐뭇하다. 맛있는 봄 열무가 제철이다.
김치를 다 버무리고 통에 차곡차곡 담으니, 어머니의 환한 미소가 눈에 어른거린다. 엄마를 닮은 딸 김치 정도는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곳에서 편히 계세요. '엄마의 손맛처럼 맛있게 숙성되어라' 주문을 하면서 두통 가득 담은 넉넉한 김치를 보니 장마철이 온다 해도 든든하다. 엄마의 열무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고 추억이고, 계절이고, 사랑이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길 끝에서 나는, 다시 어머니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