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의 밤

계절의 날씨로 분위기 있는 장면 묘사하기

by 수련

깊은 겨울의 한가운데 산속 눈길을 걷는 사람은 둘 뿐이었다.

앞에 가도 무섭고 뒤에 가도 무섭다. 산속의 고요가 무서웠던 건 산짐승이 나타날까 봐도, 길을 잃을까 봐도 아니었다. 그날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두려웠다.


산속 길은 이미 눈이 길을 덮어 뽀드득 뿌드득 소리만이 입산을 허락한다는 최소한의 대답이었다.

주변은 숨을 죽인 채 나무는 하얀 이불을 두껍게 덮고 반짝이며 사람의 기척을 바라보고 있다.

가끔은 그 무게를 못 이겨내고 가지에서 한 무더기 눈이 쏟아졌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눈길 위에서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하던, 자연 앞에 선 고요한 두려움, 긴장감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주말에 산을 오게 된 것은 직장 동료에서 사내 연애를 시작한 지 두 달, 연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색하던 두 사람, 그는 주말 근무를 마치고

“함께 갈 곳이 있다”라고 말했다. 편한 옷과 운동화를 신고 나오라는 말에 기대와 설렘을 갖게 했다.


종각을 지나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묻지 않았다. 어디 가는데요?

질문 하나가 괜히 어색할까 봐 그냥 따라나섰다.

도봉산 망월사역에 내리자고 한다.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으로 손을 녹인 뒤에야 그는 조용히 말했다.


“천축사에 가요.”

입춘을 하루 앞둔 날이라고 했다. 사찰에는 어려서 학교 근처 영탑사로 소풍 가고, 엄마 따라 부처님 오신 날 갔던 기억이 있다. 이제 연애를 시작한 지 두 달 서로 알아가는 시절, 불평 없이 눈 덮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아직 삭막한 겨울인데 그의 말투에는 겨울을 지나 맹아가 나오는 나무처럼 윤기가 흐른다. 그 확신이 조금 부럽기도 했고,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했다. 한 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며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좁은 산길을 쉼 없이 걸어가는 게 숨이 차오르고 사람을 솔직하게 만들었다.

비좁고 험한 길을 걷다 보니 그때 처음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손을 놓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하얀 설경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며 걷기 바쁘다. 가파른 깔닥고개를 지나 산꼭대기에 다다르자 눈 속에 묻힌 듯 팔작지붕 작은 사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왜소한 학승의 안내를 받아 법당에 들어가 옆에서 하는 대로 눈치를 보며 삼배를 했다.

마음속의 소원을 기도하란다. 나는 무엇을 빌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이 낯선 곳에서 괜히 어색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저녁 공양은 단출했다. 된장국과 무짠지, 시금치 무침. 그는 밥 한 톨도 남기지 않았고

내가 남긴 밥까지 물에 말아 비웠다. 절집에서는 남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날 밥상을 대하는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사찰에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없이 보여주었다.


주지 스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자비롭고 인자한 인상의 노 스님은 다관에 찻잎을 넣고 정성으로

우려낸 노란빛이 은은한 작설차와 약과를 건네주셨다. 부드럽고 달큼한 녹차향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 스님 앞에서 공손한 그 모습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몸이 아파 휴학하고 이 절에서 일 년간 요양하면서 스님께 기예와 참선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평소와 다르게 겸손한 그의 태도가 사람을 오래 설명해 줄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스님은 내 생년월일과 시를 물었고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 질문이 훗날 큰 파장을 일으키고 오래 기억에 남을 줄 그때는 몰랐다. 스님은 산길이 험하니 하룻밤

묵고 내일 내려가라고 했다.


그날 밤, 입춘 기도를 위해 서울에서 올라온 다섯 분의 할머니들이 계신 방으로 행자승이 안내해 주었다. 펄펄 끓는 온돌방에 누워 있으면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밖에서는 풍경소리와 산바람이 처마 끝을 스치고 있었고, 이곳은 어디고 나는 여기 왜 왔는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새벽 네 시, 둥— 둥— 둥—

종각의 법고를 두드리는 북소리가 겨울 산속의 청명한 하늘을 깨웠다. 할머니들은 벌써 법당으로 가셨는지

방에는 혼자 남아있다. 두리번거리다 문을 열고 툇마루에 앉았다. 적막한 밤 빼곡하게 보이는 별빛이 유유히 쏟아지고 법당의 금빛 불빛만 은은하다. 밤사이 살짝 싸락눈이 내려앉아있고 차갑고 투명한 공기가 얼굴을 시원하게 스친다. 크게 가슴을 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폐부 깊숙이 청정한 공기를 가두고 잠시 숨을 멈추어 본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옅은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산 아래에는 옅은 구름처럼 안개가 피어올라 설국의 이곳이

이승인지, 신선이 사는 극락인지 잠에서 덜 깬 꿈속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때 눈 덮인 길 저편 요사채에서 사그락 소리를 내며 그가 걸어오고 있다. 뛰어가 안기고 싶다. 반가워 눈가가 축축해진다. 목석인양 앉아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을 많이 믿고 좋아하고 있구나. 입춘을 앞둔 산은 여전히 겨울이지만, 그날의 나는 봄날의 꽃망울을 생각하며 한 계절을 건너고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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