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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CCO Apr 05. 2023

한국의 산, 언제부터 푸르렀을까?

식목일 특별기획|한국의 산림녹화 이야기

언제 어디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울창한 숲을 볼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언제나 저 숲이 푸르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푸른 숲은 몇 백 년에 걸친 오랜 산림황폐화 이후 극적인 노력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산은 많지만 나무는 없는 민둥산으로 가득했던 우리나라. 그 산림의 역사를 따라가 보자.


조선 후기 - 급격한 인구 증가

조선의 산림 파괴 심각성을 나타내는 기록은 1600년대부터 꾸준히 등장한다.

도성 사방에 있는 산들이 볼품없이 벌거숭이가 되어 이미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 실록 1621년 기사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가 잦아든 이후, 조선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의 호구(戶口) 통계자료를 보면, 자료의 누락과 오류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더라도 17세기 중반 800-900만에서 19세기 말기 1,700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추정된다.


인구의 증가는 곧바로 연료재인 땔감 사용량의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일부 가옥에만 설치되어 있던 온돌이 17세기를 지나 지역과 계층의 구분 없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지배계급은 산림자원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고, 지속 가능한 정책과 기술 없이 무분별한 산림벌채를 이어나갔다.

1903년 서울의 민둥산. 소 등에 실려있는 것은 모두 땔감이다. (C) 조선일보


아래 지도는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제작된 <조선임야분포도>이다. 일제강점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제작되어서 조선후기를 막 지난 한반도의 산림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데,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벌채가 가능할 정도로 성장한 숲으로 전체의 약 30% 정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표시된 나머지 70%가량은 헐벗었거나 어린나무가 자라고 있어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조선임야분포도 (C) 국립산림과학원


일제강점기 - 수탈의 역사

일제 치하에서 산림황폐화는 가속화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한 전함을 만들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국유림 중에서도 최고급 아름드리나무부터 수탈해 갔는데, 함경남도의 경우 1927~1941년 사이 약 14년 동안 45% 이상의 나무 부피가 감소했다.

압록강에서 운송되는 방대한 양의 나무들 (C)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제의 농민에 대한 수탈도 결국 산림 황폐화로 이어졌다. 일제 치하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삶을 유린당한 농민들이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어, 불을 지르고 땅을 갈아엎고 감자와 콩, 옥수수 등을 재배하며 불가피하게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고, 산림은 그야말로 헐벗게 되었다.


해방 이후 - 늘어나는 목재 수요

해방이 되었다고 없던 산림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됨에 따라 산업용 목재의 수요가 더욱 늘었고, 인구 증가에 따른 땔나무의 소비량도 더욱 증가했다. 특히 서울 지역의 연료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경기도, 강원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 나무를 실어왔음에도 서울의 연료 소비량을 충당하기에는 무리였고, 사람들은 부족한 땔감으로 겨울을 나는데 전전긍긍했다.


화석연료 공급을 확대하고, 아궁이를 개량하여 나무 연료의 사용을 줄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나무에 의존한 생활 방식을 단기간에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1940~1950년대에 산림 황폐화는 극에 달하고, 한반도에서는 먼지가 날리는 황토빛 지평선만 보이게 된다.


1960-70년대 - 치산녹화사업의 전개

1960년대 대대적인 '치산녹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우리나라의 산림 역사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가장 먼저, 전국에 퍼져있는 화전민의 이주를 독려해 나무를 심을 터전을 마련했다. 다음으로 황폐한 산의 흘러내리는 흙들을 계단식으로 고정하는 사방사업이 시행되었다. 드디어 숲을 복수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흙을 고정시키는 '사방사업'이 진행되는 모습 (C) 국립산림과학원


이후 본격적인 나무 심기가 시작된다. 초기 녹화사업은 시급한 문제였던 연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료림 조성을 위주로 이루어진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고 짧은 시간 내 수확이 가능한 아까시나무 오리나무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심어진다.


1980년대 - 치산녹화사업의 결실

녹화사업이 진행되자, 매년 봄마다 전 국민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늘 없는 뜨거운 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일한 이들은 반나절에 해당하는 밀가루를 받아갈 수 있었고, 이것으로 죽을 쑤어 먹으며 허기를 면했다. 국토녹화 사업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헐벗은 벌거숭이 민둥산을 개미떼처럼 기어올라 어린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씩 심어 거대한 민둥산에 점 하나씩을 찍기 시작했던 것이 마침내 붉은 민둥산을 푸른 어린나무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 '대한민국 山' 세계는 기적이라 부른다 104쪽 -


어려운 시절, 사람들은 메마른 땅에 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새순을 돋아가는 나무의 모습에 국가의 미래를 투영했다. 많은 이들이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채 자발적으로 푸른 희망을 심어나갔다.

치산녹화사업의 전개 과정 (C) 산림청


1960~1970년대에 이루어진 범국민적 노력에 힘입어 연료림 조성은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고, 조림 산업은 경제적 이득까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구조로의 전환을 맞이했다. 리기다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등 목재로써의 활용 가치가 높은 용재림과 농가 소득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는 특용수종의 조림이 시작되었다. 온 나라가 수 십 년간 쏟아부은 노력의 결실이 비로소 빛을 발한 것이다.


현재 - 그래서 푸른 산이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조림 사업은 헐벗은 산지를 상당 부분 푸르게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서 재조림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산림은 현재 문제 없이 제 기능을 하고 있을까?


문제가 없지는 않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숲은 아기나무, 청년나무, 장년나무, 노령나무가 함께 공존하는 숲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나무들이 비슷한 시기에 심어져서 동시에 나이가 들었다. 탄소를 흡수하여 공기 정화를 하는 나무의 역할은 청년기에 정점을 찍고, 중장년기를 거치며 서서히 쇠퇴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나무의 70% 가량이 이미 중장년기에 해당하는 4영급에 해당한다. 그 말인 즉 겉으로는 푸른 숲이지만, 대다수의 숲이 공기를 정화하는 기능이 쇠퇴하여 온전한 푸른 숲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 나무의 총 부피(총임목축적)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음에도 매년 새롭게 생장하는 나무의 부피(순입목축적)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감소하는 양상을 띠는 것은 이러한 실태와 관련이 깊다.

영급별 탄소 흡수량. 4영급부터 서서히 감소하는 양상을 보인다. (C) JTBC 뉴스 캡처


여기서 나무를 많이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숲의 관리가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빽빽하게 자라 숨도 못 쉴 지경이 된 숲은 솎아베기를 해서 생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는 잎과 가지의 양이 늘어나는데도, 이들이 방치되어 건조한 시기에 대형 산불의 확산을 촉진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림청은 산림자원의 순환과 체계적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 식목일

일제강점기에는 '식수기념일'이라는 날이 있었다. 이 날은 1911년부터 4월 3일로 지정된 이후 1945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기념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4월 5일은 어디서 나타난 날짜일까?


우리나라에서 양력 4월 5일로 환산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문무왕 17년 2월 25일,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삼국통일 성취한 전승일

조선 성종이 세자와 문무백관 거느리고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친제와 친경(밭을 일굼)을 했던 농림사적 의의가 깊은 날

1909년 순종황제가 동대문 밖 동적전에서 친경식을 거행하고 직접 식수(나무를 심음)를 한 날

또한, 청명일과 한식일이 겹치는 의미있는 절기이자 나무를 심는 적기


실제로 이러한 기념비적인 역사를 바탕으로 식목일이 제정되었다. 공휴일에서도 제외되면서 식목일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에 비해, 날짜가 제정된 의미는 가볍지 않다.


힘들게 되찾은 푸르른 숲의 모습이 후대까지 지속될 수 있도록, 순환적 산림 경영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진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오늘 문득 내가 사는 동네의 푸른 산이 눈에 들어온다면, 우리 산림이 겪은 역경과 극복과정을 잠시 떠올려보고, 미래의 산림 정책에 작은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던 동네 뒷산의 푸른 풍경이 세대에 걸친 절실한 노력과 희생을 통해 간신히 되돌려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나무 그늘 하나의 존재조차 남다르게 다가오는 듯하다.




YECCO 콘텐츠기획팀 심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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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배재수, 장주연, 노성룡, 김태현,「광복 이후 산림자원의 변화와 산림정책: 녹화 성공과 새로운 도전」, 국립산림과학원 연구신서 제125호(2022)

산림청, "'대한민국 山' 세계는 기적이라 부른다", 한국임업신문사(2006)

김주일,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 현대불교신문, 2022.12.01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209

최완기, "조선 후기 인구의 증감에 대한 연구",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33_0020_001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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