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을 통해 바라 본 유교의 도시, 한양
우리도 모르는 새 매일 '유교'의 가치가 구현된 공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최첨단의 인프라를 갖춘 휘황찬란한 도시 서울이, 고리타분한 유교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를 어색함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명절에 제사를 지내고 학교에서 예절의 중요성을 배우면서도 유교가 우리와 가깝다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유교가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유학의 덕목을 실천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바로 계획도시 서울에 유교의 이념을 담아낸 정도전의 목적이 실현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사대문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개념을 담아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유학의 원리를 체득하도록 구성한 도시가 바로 조선의 한양이다. 그렇다면, 유교의 이상이 서울이라는 도시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우리나라의 보물이자 흔히 동대문이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흥인지문이며, 어질고 착한 마음이 번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 안 동쪽에 위치한 한성부를 보호하고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성문보다 높고 튼튼하게 세워졌다. 지금도 흥인지문 앞에 가보면 나머지 문들과는 다르게 옹성이 성벽을 한 겹 더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위해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졌지만, 역설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함락된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문이기도 하다.
서쪽의 대문인 돈의문은 ‘두터울 돈(敦)’에 ‘옳을 의(義)’자를 사용하여 의를 두텁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북쪽 지역인 평양과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관문이었으나, 현재 돈의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경매에 부쳐져 팔려나간 것이다.
<서대문의 낙찰 205원>
시구개정으로 인하여 경성 서대문을 헐기로 결정하고, 총독부 토목국 도로과에서는 6일 오전에 경매 입찰을 행하여 결국 205원 50전으로 경성 염덕기에게 낙찰
- 매일신보 1915년 3월 7일자 -
위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대문은 보존되지 못하고 해체되어 건축자재로 쓰이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여러 차례 복원이 거론되었으나 예산 문제와 교통난을 이유로 번번이 계획이 무산되었고,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돈의문 터에 표지석이 남아 그 흔적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2019년에는 이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증강현실을 통해 구현한 가상공간에서 온전한 돈의문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예전 돈의문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돈의문 체험관에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대문 중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숭례문은 모두가 아는 우리나라의 국보이자 한양도성 남쪽에 자리한 대문이다.
예(禮)를 숭상한다는 뜻에 걸맞게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했으며,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올 때 통과하게 되는 상징적인 외교 통로의 역할을 했다.
숭례문은 현판이 가로로 달려있는 나머지 세 곳과는 달리 세로로 된 현판을 가지고 있는데,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인 '崇'(숭)자와 오행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예(禮)를 수직으로 포개어 놓아 관악산이 뿜어내는 화기를 맞불을 놓아 막고자 했다는 가설이 있으나, 공식 문헌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가설은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공자가 남긴 말 중 하나로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다시 말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는 말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이 논어 구절 중 立於禮(입어례), 즉,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숭례문은 200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3년 4월에 성벽까지 더해져 다시 복원되었으나, 복원과정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당시 정부가 전통 기법에 의한 복원이 가능한지 확인하지 않은 채 국민들에게 전통 기법으로 숭례문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결론적으로 전통 기법으로 복원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이후 10년이 흘렀음에도 마땅히 이를 대체할 전통 복원 방법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명 인의예지를 따서 사대문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왜 숙지문이 아니지?” 그렇다. 숙정문은 다른 세 개의 대문과는 다르게 현재 이름에 ‘지(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본래 명칭은 소지문(昭智門)이었으나 이후 숙청문을 거쳐 숙정문으로 바뀌었다는 의견이 있고*, 원명은 홍지문(弘智門)이었으나 양반 계층에서 백성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을 경계하여 ‘지(知)’자를 넣는 것을 반대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중요한 건 본래의 이름이 ‘지(知)’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혹은 그게 아니었다 해도 숙정문은 본래 ‘지’의 의미를 품은 대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래의 사진에서 현재 숙정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2009. 이현군.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었기에 숙정문은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통로의 역할보다는 형식적인 성문의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데다 북쪽에 위치하여 음의 기운을 품고 있다고 여겨졌던 숙정문은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 있다가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오기를 기원하며 개방되기도 하였다.
‘인의예지’에는 ‘신’이 더해져 오상(五常), 즉 오륜을 완성하게 된다. 사방에는 각각 인의예지의 이념을 담은 대문을 설치했는데, 그렇다면 ‘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바로 종로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보신각에 마지막 글자인 신(信)이 들어있다.
옛 지도에는 보신각이 ‘종루’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종루로 불렸던 보신각 때문에 현재 이 거리의 이름이 종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종이 있었던 걸까? 지금에야 새해를 맞이하여 타종 행사를 할 때만 이 종이 사용되지만, 현재와는 달리 시간을 알 수 있는 수단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타종을 통해 시각을 알렸다. 오전 4시경에는 33천(天)에 맞추어 큰 쇠 북을 33번 쳤고 밤 10시경에는 28수 별자리에 맞추어 28번 타종하였다. 따라서 보신각은 통행이 시작되는 아침과 통행이 금지되는 밤에 시간을 알리고 백성들의 이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종루'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때는 1895년, 고종이 평범한 종루라는 이름 대신 ‘보신각’이란 현판을 내린 이후부터다. 그 뒤로 쭉 보신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사대문과 보신각은 이렇듯 도시 곳곳에 구현되어 백성들에게 유교의 질서를 자연스럽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은 고려의 신진사대부가 역성혁명을 통해 새롭게 건국한 국가였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며 체제가 변혁됨에 따라 국교였던 불교를 대신할 새로운 국가적 이념이 필요했고, 그 사상적 전환을 위해 도입되었던 것이 유학이었다. 사상적 전환을 위해 유교 이념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에 정교하게 구현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따라 유교적 이념의 토착화가 사대문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 도시라는 공간을 통하여 백성들의 생활과 생각에 유교의 질서가 응당 그래야 하는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잡힐 수 있게끔 만든 것이다.
성곽은 안과 밖을 구분짓는 장벽이자 경계이다. 도성 안과 도성 밖은 서로 다른 세계이지만 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성은 조선의 중심이 아니라 고립된 섬에 불과할 뿐이다. 도읍은 나라 전체와 연결되어야 했고,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문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은 백성들이 매일 같이 드나드는 도성의 대문에 각각 유교의 이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백성들이 문을 드나들 때마다 유교의 가르침을 체화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가 그렸던 유교의 이상은 공간을 통해 구체화되었고, 구체화된 공간은 백성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나쳤던, 유교의 이념이 구현된 서울의 옛 모습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보았다. 조선시대의 한양이 현재의 서울과 다른 도시이듯, 21세기의 서울은 20세기 서울과 다른 도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서울은 과연 어떤 도시일까?
도시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상이 구현되는 공간이다. 우리는 오늘날 어떤 가치를 서울에 담아내야 하고, 어떤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가까운 시일 내 사대문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문 앞에 서서 조상들은 어떤 서울을 꿈꿨을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지금까지도 서울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잘 전해져 오고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가 남기고 싶은 서울에 대해 각자 생각해보도록 하자. 먼 미래에는,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후손들에게 추억되고 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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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예코) 콘텐츠기획팀 백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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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이현군.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청어람미디어. 2009
함성호. 사라진 서울을 걷다. 페이퍼로드. 2021
유광종. 지하철 한자여행 1호선. 책밭. 2014
정성식. 「14세기 정도전의 유교입국론」. 동양고전학회. 81집(2020)
문화유산채널: 한양 사대문 조선의 역사를 담다
https://www.k-heritage.tv/ko/M000000267/media/view?pstNo=12058
문화유산채널: 서울 한양도성 1부 [漢陽都城]-조선 최대의 프로젝트 한양도성
https://www.k-heritage.tv/ko/M000000267/media/view?pstNo=1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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