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에 잃어버린 광화문 월대, 2023년에 그 역사를 다시 잇다.
'도대체 이 평평한 공간이 무엇이길래 도로의 모양을 바꾸면서까지 복원을 한다는 것일까?'
광화문 앞에 놓인 길이 48.7m, 폭 29.7m의 공간, 월대. 오늘 그 복원이 지닌 가치를 알고자 한다.
월대란 궁궐의 주요 건물에 설치하는 말 그대로의 넓은 대(臺)를 나타낸다. 주로 건물의 입구와 연결되어 지면 높이 이상으로 높고 평평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달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를 뜻하는 월견대(月見臺)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전한다.
이 월대라는 공간은 보통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되어 국가의 각종 의식과 행사를 진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광화문 월대처럼 궁궐 정문 앞에 조성된 월대는, 의례의 장소로서 왕실의 환궁 및 장례와 같은 주요 행사, 임금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시험(무과 전시), 군사행사는 물론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굵직한 행사들이 열렸다. 또한, 백성들의 억울함을 전하는 상언과 격쟁이 이루어지며, 궁궐과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가교로서 조정과 백성을 잇는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실록에도 월대에서 열린 각종 행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기록을 살펴보면 월대는 현재의 광화문 광장보다는 좀 더 의례적이고 엄격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모이고 각종 행사가 이루어지는 광화문 광장의 역할도 일정 부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친히 응시자(應試者)에게 책문(策問)을 과시(課試)하고, 광화문 밖 장전(帳殿)에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였다. 《세종실록》권 97, 1442년(세종 24) 8월 13일
“조종조 때 광화문(光化門) 밖에 전좌하시어 관무재(觀武才) 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곳은 종일 볕들고 곧은 길이 매우 멀리 뻗어 있어서 말 위에서 부리는 재예를 다 시험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별로 수리할 일도 없으니 그곳에서 전시를 보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중종실록》 권 92, 1539년(중종 34) 11월 23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에도 월대가 있었을까? 물론이다. 창덕궁 돈화문 월대는 도로 확장으로 묻혔다가 2020년 복원이 완료되었다.
대한문의 월대는 복원이 아닌 재현 중인데,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대한문의 위치가 원래 위치에서 33m가량 물러선 지점으로 이전되어서 원위치에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현 대한문 앞에 원형고증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재현을 하고 있다. 이렇듯 창덕궁과 덕수궁의 정문에도 월대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광화문의 월대는 동서 방향으로 화려하게 난간석을 두른 유일한 월대여서 그 규모가 남다르다.
월대는 비단 문 앞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궁의 정전을 비롯한 편전, 정침, 침전, 동궁 등의 공간에 묘사된 월대의 모습을 <동궐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의 월대는 2단으로 올려져 있어서 건축물에 위엄을 더하면서도 국가적 의례가 거행되었던 근정전의 용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장치다.
광화문 월대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화재로 함께 훼철되었으나, 1867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월대는 조선의 얼굴이자 중심으로서 광화문 앞을 지켜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후기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립으로 인해 광화문과 월대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안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광화문과 육조거리 또한 곧장 일제의 편의에 맞추어 개편된 것이다. 물자와 사람을 쉽게 이동시키기 위해 서울 곳곳과 조선총독부를 연결시키는 전차 선로를 개설하였고, 이 과정에서 1923년 광화문 월대 또한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광화문 역시 해체되어 1927년 원래의 자리를 떠나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옆으로 이전하게 된다.
조선의 중심 광화문은 이후 식민 권력의 중심지로서 일제의 통치를 위해 철처히 이용되었다. 2022년 발굴 조사 당시 사진 속 월대 일부를 덮고 있는 철로의 존재를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이 복원된 지금, 월대의 복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월대가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왕실의 의례가 거행되고 조정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로서 광화문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원래 광화문 앞을 지키는 두 마리의 해태상은 지금처럼 광화문 궁성 바로 앞에 붙어있지 않았다. 공명정대한 법을 수호하는 상상의 동물 해태(해치)는 조선시대 감찰기관이었던 사헌부 앞길 양쪽에 놓여 있었다(현 서울정부청사 앞). 사헌부의 관헌들이 관복에 해태 흉배를 달았던 이유 또한 해태가 선악을 가리고 법을 수호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1890년대의 사진을 보면 해태상 앞에 'ㄴ'자 모양의 받침돌이 보이는데, 이것은 말이나 가마에서 내릴 때 발을 딛는 하마비였다. 즉, 해태상 앞에서 말에서 내려서 월대를 지나야 비로소 광화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화문 월대 앞 해태는 고종실록에도 이러한 기록이 보인다.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상위(象魏, 엄정한 법률제도)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노마(路馬, 임금의 수레)에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고종실록》고종 7년(1870년) 7월 10일 2번째 기사
문화재청이 도로를 옮기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월대를 복원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광화문은 단순한 출입문이기 이전에 조선왕조의 상징성을 지닌 건축이다. 하지만,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바로 앞에 차도가 지나가서 문으로 향하는 과정 자체가 단절되었다. 출입문만 놓여진 궁궐이 아닌, 궁의 정문으로 향하는 공간을 갖추고 백성이 볼 수 있는 곳에서 국가적 의례를 거행하는 소통의 공간을 갖춘 궁궐. 이것이 월대 복원이 가진 상징성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전통을 계승하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확립할 수 있는 하나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문화재를 통해 과거의 아픈 기억을 기억할 수 있으며, 앞으로 추구해야할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월대가 지니는 ‘훼손’의 상처와 ‘소통’의 가치처럼 말이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원형 그대로, 실물 그대로 복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건물의 복원이 아닌 유적지와 문화재를 중심으로 하는 그 시대의 '문화'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2023 월대의 복원을 통해 2010 광화문 복원이 완성되고, 문화재청의 경복궁 복원사업 중심축이 비로소 완성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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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예코) 콘텐츠기획팀 최서희, 김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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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보는 광화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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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민규.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 고궁문화, 2018.
이현진, 손신영. "조선후기 궁궐의 殿閣 月臺와 의례 — <동궐도>와 <서궐도안>을 대상으로 —" 동양고전연구, 2017.
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복원 등 고증조사 연구』. 2018.
문화재청. “광화문 월대의 규모와 변화과정 확인되다”. 2023.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을 위한 학술발굴조사 시작”. 2022.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 “문화재청, 서울시와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발굴조사 현장 공개”. 2023.
유상영. “문화재 복원은 그 시대의 '문화'를 복원하는 것”. 헬로디디. 2009.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29386
이기환. "월대가 무엇이기에 광화문 앞을 파헤치고 도로 선형까지 바꿀까". 경향신문. 2022.09.20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92005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