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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CCO Aug 20. 2023

역사를 뒤바꾼 사건들, 어디에서 일어났을까?

당신이 아는 바로 그 사건의 현장

우리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몇몇 순간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를 구성하는 사건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궁궐의 경우에도 그렇다. 한때 조선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던 사건들이 궁궐 곳곳에 일부 조각만을 내놓은 채 잠들어있다. 조선의 궁궐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서 일어났을까? 


01. 훈민정음 창제의 기원을 찾아서

경복궁 수정전 (C)국가문화유산포털


한글 창제의 산실

세종대왕이 집현전에서 한글을 창제하셨다고 하는데, 집현전은 어디에 있을까? 현재 집현전은 남아있지 않지만, 경복궁 수정전이 후대에 집현전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다. 바로 이 곳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기원인 훈민정음이 탄생했다. 집현전은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곳이었고, 세종은 그런 집현전 학자들을 매우 아꼈다. 장서각을 만들어 학자들이 귀한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해 줄 정도였다. 덕분에 세종 시기 조선은 과학, 역사, 천문, 음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C)국가문화유산포털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를 편찬하고, 이를 실제로 활용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펴내기도 했다.  한글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는 점에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아주 과언은 아닐 것이다.



02. 사도세자의 비극

창경궁 문정전 (C)국가문화유산포털

이 곳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사도세자는 일찍이 태어나자마자 세자로 책봉될 정도로 아버지 영조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영조는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을 매우 아꼈고,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 왕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너무 어릴 때부터 세자에게 쏟아진 지나친 기대는 그를 지치게 했고, 정치권의 다툼에 휘말리고 아버지의 엄격함에 큰 스트레스와 애정결핍을 겪은 사도세자는 영조의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굉장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자에게도 빈틈없는 완벽함을 요구했으나 그의 완벽주의는 아들에게는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몸과 마음이 병든 세자는 점차 기행을 일삼았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영조는 1762년 세자를 폐위시키고 쌀 항아리인 뒤주에 가둔다.  그 곳이 바로 위의 사진에 나오는 창경궁의 문정전이다.  

(C)영화 <사도>

더운 초여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사망하였으며, 훗날 오랜 시간이 흐르고 영조는 자신의 지나침을 뉘우치며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다시 세자로 복위시켰다.



03. 국모를 잃다, 명성황후 시해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C)국가문화유산포털

이곳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된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한 장소이다. 궁궐 내의 다른 전각과는 달리 화려한 단청이 없이 일반 사대부집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은 이 궁궐 같지 않은 건물을 세움으로써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자주적인 결단과는 상반되게 오히려 가장 자주적이고자 한 곳에서 외부 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러시아와의 친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친러파가 등장했다. 명성황후 역시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 대표적 친러파였기에,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 아래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바로 그 곳이 사진 속에 등장하는, 경복궁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청궁 곤녕합이다.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이후 고종은 자신을 위협해오는 일본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갔고, 이후 경복궁은 조선의 역사에서 점차 뒤안길로 사라졌다.



04. 경술국치와 대한제국의 몰락


한일합방 조약 조인서 (C)한국학중앙연구원

1910년 조선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순종은 국권을 일본에게 넘기면서 조선왕조의 막을 내렸다. 조선의 3대 통감으로 온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종래에 지니고 있던 사법·경찰권 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고, 통감은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했다. 22일 조약이 조인되면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종료됨과 동시에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약 제1조에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창덕궁 흥복헌 (C)궁능유적본부

복을 일으키는 곳에서 나라의 명운이 다한 곳으로

 이 경술국치가 일어난 곳이 바로 창덕궁 대조전의 흥복헌이다. 복이 있는, 복을 일으키는 곳이라는 본래의 뜻과는 상반되게 대한제국의 역사는 이곳에서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경복궁의 수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건청궁 곤녕합, 창덕궁 대조전의 흥복헌에 대해 둘러보았다. 네 곳 모두 우리가 애초에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던 곳은 아니다. 그렇지만 딱히 특별한 일이 벌어졌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곳들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이 네 곳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장소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이 엮이면 기억은 구체화 된다. 궁궐은 더 이상 단순히 왕실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한글의 탄생, 안타까운 누군가의 죽음, 한 국가의 비극적 결말이 건물 안과 밖에 녹아있다. 나중에라도 궁궐에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글 속 등장한 장소들을 찾아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발자국을 따라가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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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예코 콘텐츠기획팀 백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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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https://www.kwnews.co.kr/page/view/202308011355365396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529080000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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