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CCO Jun 23. 2024

우리 용의 발자취를 따라

물이 있는 곳에는 항상 용이 살고 있다


2024 갑진년, 청룡의 해가 벌써 절반 가까이 지났습니다. 다들 용처럼 기운찬 한해를 보내고 계신가요?


예로부터 용은 동아시아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청룡'은 백호, 주작, 현무와 함께 사방신 중 하나로, 동쪽을 관장하며 동방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오행 사상에 따르면, 청룡은 나무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봄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신들과 함께 고분 벽화로 그려졌습니다. 우리는 고대 무덤 동쪽 벽이나 관의 왼쪽에서 청룡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현리 대묘 동벽 청룡 모사도 / (C)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그림은 고구려 고분(평안남도 강서군 우현리 소재)에 그려진 청룡입니다. 백제 고분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사대문에도 각각의 방위에 맞추어 사방신이 그려졌습니다.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과 한양의 사대문인 숭례문 천장에서 청룡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간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을 사신이 지키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한 소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우리는 용을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용의 모습

청룡도 / (C) 국립중앙박물관

그렇다면 용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중국 위나라 장읍이 편찬한 자전(字典) ‘광아(廣雅)’에는 용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서양의 용과는 그 모습이 매우 다른 듯합니다. 동양의 용은 이처럼 여러 동물의 부분들이 요모조모 섞여 있지만, 서양의 용을 떠올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완전한 형체를 갖추고 있지요. 심지어 배는 뚱뚱하고,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입에서는 불을 뿜습니다. 그들은 동굴에 틀어박혀서 번쩍이는 보석들과 황금색 금붙이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늘 용과 맞서 싸우고, 끝내 승리합니다.


동양의 용은 어떤가요? 뱀처럼 날씬한 몸에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고, 날개는 없지만 하늘로 승천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표독스럽기보다는 동쪽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매우 신성한 존재이지요. 또한, 불과 관련 있는 서양 용과는 상반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일상 곳곳에서 ‘용‘을 마주합니다. 볶음밥 위에 계란 후라이를 올릴 때 ‘화룡점정’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해 성공한 사람에게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을 사용하기도 하죠. 저녁마다 방영되는 사극 드라마에서는 어떤가요? 왕이 입는 옷에는 용 자수가 새겨져 있고, 왕실 의례에 사용하던 자기에는 용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왕의 얼굴은 용안이라 일컫고, 왕이 앉는 자리는 용상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용은 우리 삶과 가깝게 맞닿아 있는 동물입니다. 사극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는 자연스레 용이 왕을 상징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조선시대의 용

용이 왕을 상징한다는 인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이 등장하면 왕이 탄생한다’와 같은 이야기는 전설의 형태로 향간을 떠돌았으나, 용이 곧 왕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하고 신성한 동물의 이미지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들은 이전부터 민간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던 용을 선택했어요. 이렇게 용은 정치권력과 결부되며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굳어졌습니다.

홍문대기 / (C) 국립고궁박물관

위의 깃발은 '홍문대기'라고 부르는 깃발입니다. 홍문대기는 빨간색 바탕에 청룡을 그린 깃발입니다. 왕의 의장 행렬 선두에서 좌우에 하나씩 배치되어 거기서부터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했습니다. 깃발 중앙에는 5개의 발톱을 갖춘 청룡이, 그 주위로는 다양한 색깔의 구름과 여의주가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의장 행렬 중 가장 앞에 서는 깃발이었고, 이후에도 이 깃발은 조선 내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고대 민간의 용

그렇다면, 본래 민간에서 용은 어떻게 여겨졌을까요? 용은 비와 물을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악함을 내쫓고 좋음을 취하고자 하는 벽사와 기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록에서 살펴볼까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 가운데 나타났는데, 우레가 울고 폭우가 쏟아지며 궁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여름에 큰 한재가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놓고 비를 빌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두 기록에서 용과 물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간에서 용이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게 된 것은, 당시가 농경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어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물은 농작물을 기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충분한 강수량이 있어야만 쌀, 보리, 콩 등의 주요 작물이 잘 자라서 풍년을 이룰 수 있었지요. 비가 적절히 내리지 않으면 가뭄이 발생하고, 이는 농작물의 수확량 감소로 이어져 기근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물이 매우 중요했기에, 물의 신인 용 역시 민간의 중요했습니다. 용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던 비를 내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고려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고려의 '토룡 기우제'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흙으로 만든 용 모형에다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했습니다.

청룡도 / (C) 국립중앙박물관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에는 늘 용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용은 우물 안에도, 실개천에도, 심지어는 바다에도 살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바닷가와 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풍어와 안전을 위해 마을의 용왕신에게 의례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심청전>이나 <구운몽>, <별주부전> 용궁도 그러한 인식이 드러난 예라고 수 있습니다. 물속 깊은 공간을 용이 사는 이상향으로 그려냈습니다. 또한, 바다를 담당하던 보통의 용을 바다의 왕이자 신으로 신격화 했습니다.


이처럼 용은 ‘수신水神’의 모습으로 고대 민간에서부터 우리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존재였답니다.

앞으로 비가 올 때마다, 열심히 일하고 있을 용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

YECCO 콘텐츠기획팀 이승아


작가의 이전글 경복궁 안에 있었던 군부대, '30경비단'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