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손님

이런 게 행복의 맛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 따듯한 우유 한잔을 먹는 맛

by 세아

매일 아침, 나는 일찍부터 일어난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그 캄캄한 새벽부터 일어나 방에 불을 킨다. 그리고 창문을 조금 열어 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맨날 똑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새벽의 풍경은 조금 다르다. 낮 동안엔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서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편의점 사장님이라던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시는 경비아저씨, 그리고 해가 올라오면서 점점 물드는 하늘. 내가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이 순간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8시 30분쯤이 되면 창문을 닫고 얼른 학교로 뛰어간다. 그 시간의 학교는 등교하는 아이들로 인해 북적인다. 반에 들어가면 이미 자리를 잡고 공부하는 아이들과 아침부터 교실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때 나에게 오가는 말들은 형식적인 인사뿐이다.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몇몇 눈치 빠른 아이들이 주변 친구들에게 눈치를 준다. 그러면 반은 서서히 조용해지고 선생님의 말소리만 들린다. 조회는 매일매일 비슷한 내용이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 선생님은 반에서 나가고 반은 다시 시끄러워진다.


교과시간마다 선생님들이 다르게 들어오신다. 과목의 특징만큼이나 선생님들의 특징도 각각 다르다. 아이들에게 쩔쩔매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선생님도 있다. 그래도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반에서 한 명이라도 그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은 절대로 투명인간이 될 수 없다. 투명인간이 되는 건 오직 아이들뿐이다.


체육시간이다.

“얘들아 짝 피구 할 테니까 둘씩 알아서 짝 지을 수 있지?”

“네!”

아이들의 우렁찬 답이 들려온다. 그 아이들은 이미 자기 짝이 있는 애들이다. 나는 이런 선생님이 정말 싫다. 친한 아이들은 벌써 둘씩 짝을 지었다. 나는 딱히 같이 할 친구가 없어서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너 안 할 거야?”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고 반장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쌤~! 얘 빠진대요. 그냥 시작할게요. 어차피 짝도 다 맞으니까.”

나의 대답을 빠진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반장은 얼른 선생님한테 달려가 얘기했다. 맨 처음부터 나의 의견은 관심도 없었을 거다.

“그래.”

아이들은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차갑게 군다. 우리 반이 원래부터 홀수라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은 그냥 핸드폰이나 보고 있다.

“야, 쟤 또 빠져? 쟤 뭐야?”

옆에서 수군대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자기들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고 떠드는 거겠지만 시끄러운 강당 안에서도 나를 콕콕 찌르는 말들은 잘 들린다. 체육시간은 언제나 길게 흐른다.


긴 수업들이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종례까지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교실에서 우산이 없다고 발 동동 구르던 아이들은 우산 있는 친구 옆에 찰싹 붙어서 그 작은 우산을 같이 쓰고 간다. 나는 우산이 없다. 그리고 친구도 없다. 그저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윤호야.”

담임선생님이 학교가 끝나고도 몇십 분째 교실에 남아 있는 나를 불렀다.

“우산 없으면 우산꽂이에 누가 두고 간 우산 있는데 그거 쓰고 갈래?”

선생님이 우산꽂이에 꽂혀 있는 우산 중에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것을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네, 감사합니다.”

교실에서 나와 적막한 복도를 혼자서 걸었다. 건물에서 나오자 장대비라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는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텅 빈 길을 걸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평소에는 안 나던 맛있는 냄새가 어디에선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 냄새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 아파트 지하실에 도착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문틀에는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십 년간 방치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아파트 지하실 안에 있는 나무로 만든 건물 하나가 보였다.


지하실이 갑자기 엄청나게 커진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큰 건물 하나가 통째로 다 들어가겠는가? 건물에서는 맛있는 냄새와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간판에는 ‘곰돌이 카페’라고 쓰여 있었다. 왠지 모를 기운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맛있는 냄새와 포근한 기운이 커졌다. 딸랑. 문을 여니 풍경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내부는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조금 어수선했지만 그게 오히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곰돌이 카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체크무늬 앞치마를 맨 곰돌이 인형이 주방에서 나오며 나에게 인사했다.

“저희 카페의 첫 손님이세요!”

나는 순간 기겁했다.

“곰.. 인형 탈 쓰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너무 놀란 나머지 이것부터 물었다.

“아뇨. 저는 진짜 곰돌이 인형입니다. 이 카페의 사장이죠. 제가 이렇게 특별하게 생긴 것처럼 저희 카페도 평범한 카페만은 아니랍니다.”

곰 인형의 표정이나 말투, 움직임까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렇게 큰 건물도 지하실에 들어가는데 곰돌이 인형이 말을 한다고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엇, 옷이 많이 젖으셨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곰돌이 인형은 그 말을 남기고는 갑자기 주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문 옆에 멀뚱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주방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조잘조잘 대화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한바탕 소란이 조용해진 후 곰돌이 인형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를 담아서 주방 밖으로 나왔다.

“이 우유는 뭐죠? 저는 뭘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사장님이 테이블에 우유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희 카페는 딱히 메뉴가 없거든요. 그때그때 손님들이 드실만한 걸 내온답니다. 이건 따뜻한 우유예요. 오늘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는 따듯한 걸 먹어야 몸도 마음도 따듯해져요.”


우유를 한 모금 마시자 진짜로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분명히 우유라고 했는데 뭔가 다른 맛들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맛은 내 혀가 느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느꼈다. 마음속에 그 맛들이 천천히 그려졌다. 추운 겨울 포근한 이불에 들어가는 맛,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 위에 첫발을 내디디는 맛, 그냥 오늘따라 별것 아닌 일에 운이 좋은 맛. 한마디로 이건

“행복의 맛이네요.”

“행복의 맛이에요.”

사장님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이런 게 행복의 맛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 따듯한 우유 한잔을 먹는 맛, 이른 아침에 멍 때리며 해가 뜨는 것을 보는 맛.

“행복은 그렇게 비싼 맛이 아니에요. 오히려 슬픔보다도 싼 맛이죠. 싸다는 건 우리 주위 어디에나 널려 있다는 거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 걸 어려워해요. 그건 행복이 주변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찾는 요령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주변에서 행복을 쏙쏙 찾아낸답니다? 저도 오늘만 해도 벌써 5개의 행복을 찾았어요.”

사장님이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우유 한 잔이 다 비워지고 나는 계산을 하려고 일어서서 카운터로 갔다.

“우유는 얼마인가요?”

“아! 저희 카페는 돈으로 값을 받지 않습니다. 손님의 이야기에 숨어있는 감정을 받죠.”

사장님이 벌떡 일어서서 카운터 옆에 있는 병을 가져왔다. 나와 사장님은 다시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병 속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이 병 속이 감정들로 가득 차는 걸까?

“값을 치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그냥 편하게 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돼요. 그러면 제가 거기에서 감정을 찾아낼 거예요. 감정을 뺐는 건 아니고 그냥 감정을 찾는 거라서 안심해도 돼요. 이야기는 짧든, 길든 아무 상관없어요. 한번 얘기해 주실래요?”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서 며칠 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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