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는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냥 한 발만 나아가면 돼요.
책상 앞에 시험지가 놓였다. 또다. 몇 달 간격으로 계속 반복되는 시험과 점점 늘어가는 공부량. 그 속에서 나는 전교권을 유지해야 한다. 이렇게 언제까지 버텨내고 견뎌내야 하는 걸까? 버겁다. OMR마킹지에 이름을 적고 그대로 엎드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가 있었고 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열심히 마킹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빈 답안지를 담임에게 건네고 시험지는 그대로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야, 뭐야 진짜로 아무것도 안 풀었어?”
서안이가 물었다.
“응. 담임이 나 찾으면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해줘.”
내가 가방을 몰래 등에 메며 말했다.
“아휴... 알겠어. 위험한 짓만 하지 마라 정아윤!”
나는 서안이를 향해 엄지를 들어 웃어 보이고는 최대한 선생님들의 눈에 띄지 않게 복도를 지나왔다. 내가 이 무단 조퇴를 계획한 건 한 달 전이었다. 갑자기 내가 하는 모든 게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어른들이 계속 공부를 강조하며 우리를 그렇게 밀어붙이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수백 번도 넘게 들어 본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해서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고, 그러면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사실 한동안 공부만 하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서안이라는 친구가 생긴 뒤로는 내가 계속 공부만 하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나지만 계속 공부만 해야 하는 이런 생활은 너무 지겨웠다. 그래서 무작정 학교를 무단 조퇴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시험 일주일쯤 전에 이 계획을 서안이에게 이야기하자 서안이가
“와우. 역시 공부만 하니까 참았던 게 터지는구나. 그래, 이런 경험 언제 해보겠어! 위험한 짓만 하지 말고 돌아와라.”
라며 웃었다. 나는 서안이가 부럽고도 고마웠다. 공부와 휴식을 적절히 조절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고 있었다. 자신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들을 벌써부터 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꿈도 키워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서안이가 나랑 친구라는 게 정말 고마웠다.
어느새 학교 건물을 나왔다. 실내화에서 신발로 갈아 신고, 경비를 서시는 분의 눈을 피해 학교 후문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서안이 말대로 참았던 게 터졌나 싶었다. 지금껏 영화에서만 봤던 일을 내가 실제로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멀리서 시험시작을 알리는 학교 종소리가 들렸다. 몇 분 후면 시험 감독을 하러 들어오는 선생님이 내가 학교에서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최대한 학교에서 멀리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적당한 바람이 내 얼굴에 스쳤다. 이게 바로 해방감이구나 싶었다.
나는 진짜로 공부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공부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공부하는 건 좋은 일이니까 공부만 했다. 친구를 만날 기회는 학교에서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는 그들의 무리에 잘 들어가지 못했고 얼굴이 엄청 예쁘거나 춤과 노래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또래들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가 서안이를 만났다. 서안이는 나와는 다르게 아이들하고 곧잘 어울렸다.
꽤 인기도 많은 아이였다. 그런 서안이가 나에게 제일 처음 건넨 말은 “너는 공부만 하면 안 심심해?”였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그동안 나는 공부 말고는 무언가를 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내가 만날 가만히 자리에만 앉아 있었기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도, 내가 먼저 말을 걸 때도 없었다. 그런데 서안이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정말 달랐다. 서안이는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하는 놀이나 동네에 있는 놀거리들을 꿰고 있는 반면에 나는 모든 게 다 새로웠다. 그런데도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다. 내 생각에 우리가 친해진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 덕분이 아니었는지 싶다.
계속 뛰다 보니 어느새 주변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아파트와 주변 나무들이 동그랗게 있어서 내가 있는 곳이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왕 일탈을 감행한 거 지금 이 기분까지 즐겨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겨왔다. 한참을 뛰어서 배도 고파졌는지라 나도 모르게 그 냄새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끝에는 화단 안쪽으로 보이는 작은 창문이 보였다. 아마도 아파트 지하실인 것 같아서 문을 찾아보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아래쪽에 문이 있었다. 문의 상태를 보면 한참 동안 방치된 듯해 보였는데 그 안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겨오는 게 이상했다. 들키면 혼날 각오를 하고 지하실 문을 열었다.
지하실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지하실이 엄청 넓어 보였다. 내가 작아진 건지 지하실이 커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운동장보다도 더 넓어져 있었다. 서안이의 말대로 내가 공부만 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싶었다. 왜냐하면 이 지하실 안에 카페 하나가 떡하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볼을 스스로 꼬집어도 보고 눈을 수십 번씩 비벼도 보았다. 그런데도 저 카페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뛰어서 지친 나머지 잠이 들었나 보다.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리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카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카페의 간판에는 ‘곰돌이 카페’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문을 여니 경쾌한 풍경 소리가 들리며 주방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곰돌이가 보였다. 곰돌이 인형이었는데 체크무늬 앞치마를 한 채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집은 성인 남자 보다 10~20cm 정도 더 클 것 같이 거대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곰돌이 인형 특유의 포근한 미소가 있었다.
“저기요?”
내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곰돌이가 별 요란한 소리를 다 내며 일어났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엇, 네 손님!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잠들었네요.”
곰돌이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말했다. 나는 가까운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말하는 곰돌이라.. 뭔가 이상하지만 꿈이면 뭐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는 메뉴 없나요?”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갑자기 주방으로 헐레벌떡 뛰어가길래 메뉴판을 가지러 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참이 지나도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반죽을 치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만 울려 퍼졌다. 카페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새로 개업했는지 건물에는 새것 티가 났다. 하긴 꿈속인데 무어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
“오래 기다리셨죠? 이것 좀 드셔보세요.”
몇십 분이 지나자 곰돌이가 하얀색 그릇에 초콜릿 쿠키를 담아 왔다. 방금 만든 듯이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저희 카페는 딱히 메뉴가 없어요. 때마다 손님들이 드실만한 걸 내온답니다. 이건 초콜릿 칩 쿠키예요. 초콜릿 칩 쿠키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쿠키 중 하나예요. 특히 초콜릿 칩이 많을수록요. 좋아하는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맛있어서? 하하하”
접시에서 쿠키를 꺼내 한 입 먹어보았다. 입안에 달달한 맛이 퍼졌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펐다. 심지어 곰돌이도 자기가 무얼 좋아하는지 아는데, 내 친구들도 자기가 무얼 좋아하는지 아는데 왜 나만 그걸 모르고 살았을까? 곰돌이는 조용히 휴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쿠키는 그냥 쿠키가 아니었다. 갑자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모습, 선거에 당선된 사람들의 모습들이 줄줄이 늘어지다 좋아하는 옆 짝한테 마이쥬를 건네는 모습, 내가 평소에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학교에 가보는 모습, 오랜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건네는 등의 상황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용기를 내는 것이 꼭 대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그동안 해오던 것에서 한 발짝만 나아가보는 것이었다.
“이건 초콜릿이 아닌 것 같아요.”
“맞아요. 이건 사실 용기예요.”
곰돌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용기가... 대단한 게 아니었어요. 그냥 한 발만 나아가면 되는 아주 쉬운 것이었는데, 저는 그 쉬운 것마저도 제대로 못 했어요.”
그리고선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곰돌이는 나를 한 손으로 다독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괜찮아요. 저도 그랬어요. 이 카페를 개업한 게 제 인생에 처음 내본 용기였어요. 그전에는 되게 우울했었어요. 세상 모든 것이 저 빼고 다 행복해 보였지요. 그런데 어떤 정말 우울했던 날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카페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들어가서 음료를 주문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방금까지는 슬펐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거 있죠?”
곰돌이는 그새 울음이 멈춘 나를 보고 한번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말 별거 아니잖아요. 그저 음료 한 잔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 후로 감정들을 다루는 연습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삶이 훨씬 행복해졌어요. 그래서 그 행복을 모두에게 맛보여주기 위해 이 카페를 차린 거랍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웃는 곰돌이의 표정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아무 걱정 없다는 듯이 행복한 표정.
“제가 너무 울었죠.. 죄송해요. 일단 결제 먼저 할게요!”
내가 짐짓 당당한 척을 하면서 일어섰다.
“저희 카페는 돈을 받지 않아요. 대신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감정들을 받죠. 값을 치르는 건 아주 간단해요. 그냥 저한테 아무 이야기나 해주시면 돼요.”
나는 다시 자리에 앉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한번 미소 짓고는 입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