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손님2

삶에서 쌓아 올린 소소한 즐거움이 없으면 삶을 지탱하는 뼈대는 약해진다.

by 세아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주 큰 곰 인형이 벌떡 일어나며 인사했다. 나는 이 이상한 꿈에서 깨기 위해 짝 소리가 나게 내 뺨을 때렸다. 꿈인 줄 알았지만 뺨의 얼얼한 느낌이 이건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말하는 큰 곰 인형이라니.. 놀이공원에서 인형탈 알바하는 것도 아니고 카페에서 카운터를 지키고 있다니!

“이건 꿈이 아니에요. 저는 이 카페의 사장, 곰돌이예요. 좀 혼란스럽겠지만 나쁜 곳은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내가 놀란 만큼 저 곰 인형도 놀랐는지 내가 뺨을 때리자마자 허둥지둥 대며 말했다. 곰돌이는 나를 천천히 테이블에 데려가서 앉혔다. 그러고선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 카페는 평범한 아파트 지하실에 있는 것치고 커도 너무 컸다. 그런데 카페가 큰 것에 비해서 테이블의 개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카페 전체의 색감은 우드톤으로 곰돌이와 묘하게 어우러졌고, 그 안의 가구들은 각자 아기자기한 색깔로 카페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유리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정체 모를 색깔들이 밝게 빛나며 병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사실 말하는 곰돌이까지 봤는데 카페가 지하실 안에 있는 것과, 날아다니는 빛깔들이 유리병 안에 있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은 왠지 모르게 아까 곰돌이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 나쁜 곳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와 마치 모자를 쓴 듯한 귀여운 전등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방금까지 떠오르던 걱정들을 가라앉혀 주었다.


“블루레모네이드 한 잔 나왔습니다.”

잠시 머릿속이 고요해질 쯤에 테이블 위로 음료 한 잔이 올려졌다. 아까 본 새파란 하늘 같은 파란 음료 속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위로 올라왔다.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새 내 손과 입은 음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쏴아아 하고 파도가 밀려들어오듯이 음료의 향과 맛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탄산이 토도독 터지며 입안이 시원해졌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많은 기억들도 같이 밀려들어 왔다.

좋아하는 노래를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부르던 기억, 비가 내리는 날에 친구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던 기억,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림을 잘 그려서 상을 받은 기억. 다 즐거웠던 기억들이었다. 딱히 거창한 기억들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생긴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거창한 기억들보다 이런 소박한 기억들이 내 삶에 힘을 주었던 것 같다.

“뭐예요? 이건 그냥 평범한 음료수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물었다.

“맞아요. 이건 즐거움이에요. 즐거움은 매일 오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안겨 주지요. 보통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누리는 즐거움이 점점 줄어들어요. 그리고 대부분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나이가 들어간다고, 책임질 것이 많아진다고 누리는 즐거움이 줄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즐겁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데도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즐거움을 누리는 걸 참는 연습을 해야 돼요. 너무 바빠지거든요.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죠.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씁쓸히 말했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지만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 곰돌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말을 시작했다.

“아까 떠올렸을 기억들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 없는 즐거움이에요. 즐거움도 행복이랑 비슷해서 일상에서 잘 찾아보기만 하면 많이 발견할 수 있어요. 거창하고 멋있는 기억들로 겉만 꾸미려고 하지 말고 소소하고 즐거운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보세요. 물론 거창한 기억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겠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시간은 부족해지니 많이 만들 수는 없겠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말대로라면 어른들이 그렇게 중요시하는 장래희망을 정해서 이루는 것 말고도, 잘하는 일을 발견해서 살아가는 것 말고도 나에게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거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에 적합한 능력을 기르려면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고 잘하는 일을 찾는 게 좋다. 그렇지만 삶은 그게 다가 아니다.

돈이 중요치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쌓아온 노력을 별 거 아닌 걸로 만들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삶에는 그것보다 더한 가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삶에서는 사소한 즐거움들도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돈을 벌긴 벌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 삶에서 쌓아 올린 소소한 즐거움들이 없으면 삶을 지탱하는 뼈대는 점점 약해져서 약한 충격에도 쉽게 휘청거린다.

이제 좀 알 것 같다. 내 앞에 있는 곰돌이가 왜 소소한 즐거움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장래희망에 집착하는지. 그들은 그저 내가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싶은 거다. 그저 내가 좋은 삶을 살았으면 해서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 준 거다. 그런데 각자 방법이 좀 다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에 들어있던 꽁꽁 꼬인 실이 깔끔하게 풀어지는 것 같다.

“저.. 감사합니다. 덕분에 복잡하던 머릿속도 정리되고 맛있는 음료도 마셨어요.”

내가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계산은 어디서 할까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곰돌이가 나를 다시 책상에 앉혔다.

“저희 카페는 돈을 받지 않아요. 대신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감정들을 받아요. 어려울 것 없어요. 그냥 저한테 아무 이야기나 해주시면 돼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그러다가 그냥 내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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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고고학자가 될 거야!”

유치원에 다녀온 내가 날 바래러 온 엄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승율아, 고고학자가 되려면 유물 공부 많이 해야 해.”

엄마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 선생님 할래, 선생님!”

“선생님이 되려면 여러 가지 공부 골고루 하고, 밥도 남기지 않고 먹어야 하는데?”

엄마의 말을 들은 나는 울상을 지었다. 아직 어렸던 나에게는 왜 그런 일을 해야 그 직업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고 그저 자꾸만 뭘 해야 한다고 자꾸 말하는 엄마가 밉기만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초등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에서의 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했다.


“야 이승율! 너 운동을 왜 이렇게 못해? 너 때문에 우리 팀이 졌잖아!”

“게임은 취미가 아니야. 차라리 독서나 운동 같은 걸 취미로 해야지.”

“꿈이 의사라고? 네 점수 가지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넌 아직도 블록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냐? 네가 뭐 애기도 아니고.”

“너보다 잘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어. 그 정도로 될 것 같아?”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고, 또 들었다. 무엇을 하든지 나보다 잘하는 아이들은 많았고, 나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내가 꿈을 말하면 사람들은 나 주제에 그게 될 수 있냐며 비웃었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난 잘할 수 있다고 그들이 나를 잘못 본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니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그 말들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잘하는 것도 꿈도 없는 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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