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에게만 집중할 거다.
클수록 어른들은 잘하는 것을 찾으라고 나를 재촉했다.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일들을 짓밟아 놓고서 지금에서야 꿈을 찾으라고 나를 재촉했다.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갔다가 게임 한두 판만 하면 벌써 하루가 가고 없는데 또 뭔가를 하라고 재촉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없는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임승율! 장래희망에 뭐라도 적어 내라고 했지! 적을 게 없으면 회사원이라도 적어 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공부에도 딱히 재능이 없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던 다른 일들마저 어른들의 말대로 일찍이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이제 와서는 모두 내 탓을 한다. 나는 그들이 생각한 대로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꿈도 없다. 시간만 있다면 내가 좋아했던 것이 뭐였는지 한번 찾아보고 싶다. 다른 고민 없이 오직 행복한 꿈을 꾸었던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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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모순적이죠.”
내가 씁쓸히 말했다.
“그래도 이제 즐거움이 뭔지 다시 느껴보았으니 곰돌이 사장님의 말대로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볼게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 슬퍼 보였다. 곰돌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포근한 두 팔이 나를 폭 감싸더니 온몸의 힘이 풀어졌다. 곰돌이는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톡, 눈물이 곰돌이의 앞치마 위로 떨어졌다. 나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해서.”
곰돌이가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은 참, 슬퍼 보였다.
“맛있는 음료 마시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곰돌이의 따뜻한 품에서 벗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딸랑, 언제나 경쾌한 풍경 소리가 울렸다. 나는 어느새 아까 전에 있었던 그 아파트 단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그때 저 멀리에 내 또래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남자애가 보였다. 그 애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학교 가기 싫다. 그치?”
그 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이정현이야. 너는?”
정현이 말을 하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말투를 보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임승율. 너도 학교 안 갔어? 이러다가 지각할 텐데?”
“괜찮아. 난 어차피 학교 안 다니거든. 네 표정을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방황하던 내가 생각나서 말이야..”
정현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비웃음 같아 보였겠지만 왠지 나랑 처지가 비슷한 아이 같았다.
“이제부터라도 찾아나가야지.”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더라고. 공부하느라 그런 걸 찾을 시간이 없기도 하고 말이야. 근데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어도 즐겁기만 하면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걸 찾은 거야. 그래서 일단 학교를 그만뒀지. 여러 이유로 학교가 나랑 잘 맞지도 않았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 보기 시작했어. 그러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았어. 나는 밤에 산책하는 걸 좋아해, 너는?”
“..잘 생각은 안 해봤지만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열고 환기시킬 때 맡는 그 공기가 좋은 것 같아.”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걸 찾았네!”
“이건 좋아하는 거라고는 할 수 없지. 그냥 아주 사소한 거잖아.”
내가 답답해하며 말했다. 이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해봤자 사람들에게 비웃음만 받기 십상이다.
“그게 답이야. 아주 사소한 거.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사소한 걸 좋아하는 게 어쩌면 우리에겐 답일지도 몰라. 우리는 시간이 없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는 시간을 모으고 모아야 돼. 사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렇지만 너보다 1년은 더 살았으니 한번 참고해 보라고 전해주는 거야.”
“!? 그러면 형이었어요?”
내가 놀라며 묻자 정현 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사소한 것. 그게 진짜 답일까? 그게 없어도 인생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것인데 그걸 과연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좋아하는 게 많았지만 다 잊혀졌다. 그러면, 내가 원래부터 좋아하는 게 없었던 게 아니라면, 또다시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너랑 비슷한 여자애를 한 명 알거든. 네가 아까 갔던 곰돌이 카페에서 일하는 애야. 이름은 정아윤. 나이는 너랑 같아.”
정현 형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툭 던지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걔도 너처럼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어서 고민하던 중에 카페에 왔다가 사장님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카페에서 일하게 된 거야. 학교 끝나는 시간쯤에 카페에 한 번씩 들러봐. 그럼 나는 이만.”
형이 피식 웃더니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떠났다.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곰돌이 카페를 알고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서 좋았다. 그냥 나랑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을 뿐인데 뭔가 위로가 됐다.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나는 뭔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무의식에 있었는데 이제는 안심이 됐다.
결국에 나랑 비슷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많았던 거다. 그리고 나는 벌써 그런 사람을 2명이나 찾았다.
저 멀리 있는 사거리를 봤다. 저곳이 학생들이 학교로 갈 때 주로 다니는 곳인데 지금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에 가면 지각 처리는 되겠지만 잘 둘러대면 선생님의 경고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또 하루의 평범한 나날들을 보내겠지. 하지만 나는 학교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렇다고 그냥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교와 동네가 날 찾느라 발칵 뒤집힐 거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서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학교 안 갈 거야.’
잠깐의 반항일 수도 있다. 보나 마나 집에 들어가면 엄청난 잔소리를 들을 거다. 그래도 왠지 학교에 가기 싫었다. 시간을 주지도 않으면서 잘하는 걸 찾으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공부는 계속할 거다. 혹시나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그런 생각을 다 그만하기로 했다. 오늘은 나에게만 집중할 거다.
하늘 위를 봤다. 파란 하늘이 저 높이 둥둥 흘러간다. 바람은 온몸 구석구석 선선히 불어온다. 햇빛은 나긋나긋하게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잠시 눈을 감는다. 주위는 고요하다. 나를 귀찮게 하는 잡음 따위는 없다. 그래, 이게 바로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