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아픔은 다 큰 법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곰돌이 사장님이 말을 걸어왔다.
“요즘 좋은 일 있나 봐요?”
“네? 딱히 무슨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뭔가 전보다 밝아진 것 같아요!”
곰돌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에 담긴 미소에는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 미소를 왠지 나한테서도 본 것 같았다.
“아, 사실 저 요즘 글 쓰고 있어요.”
내가 핸드폰을 켜서 지금까지 쓴 글들을 보여 주었다. 곰돌이는 하나씩 천천히 읽어보며 웃기도 하고,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바쁘게 움직이는 그 입과는 다르게 눈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 생각에는 이제 좋아하는 걸 찾은 것 같네요. 그래서 너무 기뻐요. 사실 아픔을 혼자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그리고.. 모든 사람의 아픔은 다 큰 법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아프다고 해서 내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듯이 내 아픔을 무시해 버리면 안 돼요. 너무 아프다 싶을 때는 다른 사람한테 말해야 해요. 안 그러면 아픔이 점점 커져요.”
“그래도.. 이 정도는 별로 큰 아픔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는 미안해져요. 저보다 아픈 사람도 많은데 괜히 엄살 부리는 것 같아서 기대기도 미안해지고요.”
“가끔씩은 엄살 부려도 돼요. 나 힘들다고, 아프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 사람한테나 기대다 보면 차가운 대답이 돌아와 마음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으니 믿을 만한 사람을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믿을 만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생겨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글로 써요. 글에다가 나 힘들다고, 위로해 달라고 호소하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나만의 대나무 숲이 생긴 느낌이에요.”
곰돌이가 말을 마치고는 양팔을 벌려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 포근한 품속에서 그동안 참고 억눌렀던 아픔들이 방울방울 맺혀서 떨어져 내렸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이런 따듯함이 그리웠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지금 이 순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살며시 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에서 아주 어릴 때 느꼈을 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다시 아기가 된 듯이 세상이 무서웠다.
근데 좋았다. 날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곳이 있다는 게. 그렇지만 나는 그 품을 빠져나왔다. 언제까지고 누군가에게 기대어가며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가끔씩은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표현해 볼게요. 그런데 이제는 혼자서 이겨내는 연습도 한번 해 볼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곰돌이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제 곰돌이 카페는 막을 내려도 좋겠네요.”
곰돌이가 기쁘게 중얼거렸다.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나를 문쪽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딸랑, 언제나처럼 경쾌한 풍경 소리가 들리더니 나는 어느새 다른 가게 안에 서 있었다. 손에는 열쇠가 하나 들려 있었고 아까까지 앞에 서 있던 곰돌이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윤이와 승율이가 서 있었다. 가게 안에는 포근해 보이는 소파들과 그 가운데에 있는 귀여운 노란색 원형 테이블. 하늘에서 은은하게 빛을 비추는 조명과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까지. 여기는 영락없는 곰돌이 카페였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딸랑, 매일 들었던 그 익숙한 풍경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가게 밖에 서 있을 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조용한 골목, 은은한 가로등이 비추는 곳 옆에 있는 작은 가게. 그 가게의 간판에는 ‘곰돌이 카페’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가게 문에 꽂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는 게 느껴졌다.
이건 곰돌이가 나에게 준 선물이자 임무인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임무를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형, 형도 같이 찍어요!”
“그럴까?”
승율이가 부르는 소리에 가보니 체크무늬 앞치마를 맨 아윤이와 승율이가 곰돌이 카페 앞에 서서 브이를 하고 있고 그 앞에는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나도 얼른 그 가운데로 끼고 들어가 웃으며 손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찰칵, 셔터음과 함께 승율이는 사진을 확인하러 달려 나갔고 아윤이도 그 뒤를 뒤따라나갔다.
이 카페에 처음 온 날 아윤이와 승율이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 다 곰돌이 카페에서 곰돌이 사장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 후에 문을 열고 나가면서 풍경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에 와 있었다고 한다. 곰돌이 카페가 아예 사라진 거라고는 우리 중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딘가로 이사를 갔을 뿐, 그리고 이 동네에서의 곰돌이 카페는 새로 생겼다.
동생들과 함께 청소하고 식탁보나 인형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새로 샀다. 그런데 홍보는 안 할 생각이다. 우리가 제일 힘든 날에 운명처럼 이곳으로 이끌려왔듯이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는 아이들도 저절로 올 거라고 믿고 있다. 난 이제 웬만한 상처를 받아도 혼자 극복할 수 있게 됐고, 그러지 못하겠는 상처는 주변 사람들한테 알린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들한테 먼저 다가가 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소한 행복들을 하나씩 찾으려 해나가고 있다. 아침에 마시는 따듯한 우유 한잔이나 학교가 끝나고 들르는 곰돌이 카페에서 동생들과 떠는 수다, 밤에 창문을 열고 들이마시는 차분한 공기와, 여름이 돼 가며 푸릇하게 올라오는 푸른빛 나뭇잎들을 구경하는 게 요즘 내 행복들이다.
그렇게, 딱히 변한 게 없는 줄 알았던 나는 사실 한 뼘 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