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죽이려 봤는데, 내 시간이 먼저 당했다
나는 우울할 때 B급 액션물을 본다.
누군가는 그런 날에 치킨을 시켜 먹고, 누군가는 새벽 감성에 맞는 재즈를 튼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행을 떠나거나, 몸을 한껏 괴롭히는 운동을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내겐 총알과 폭발, 뻔한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복수극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이상할 정도로.
그중에서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내 우울을 잠깐 비웃게 만든다. 사실 ‘위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장르는 아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등장인물은 아무렇지 않게 죽어 나간다. 하지만 어딘가 엉성하고 과장된 그 장면들은, 묘하게도 내 기분을 가볍게 만든다. 현실이 너무 무거워서일까 아니면 내 안에도 저렇게 뻔뻔하게 웃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걸까.
B급 액션물의 매력은 완성도에 있지 않다. 오히려 허술함과 과장 속에 있다. 폭발은 너무 자주 터지고 복수는 늘 성공하며 총알은 끝없이 쏟아진다. 현실이라면 터무니없는 설정이지만 그 얄팍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는 없잖아?' 하고 속삭여주는 것 같다.
타란티노는 이 싸구려 감성을 누구보다 사랑한 감독이다. 그는 영화광이자 비디오 대여점 점원 출신으로, 스스로 B급 영화를 고급스럽게 차려내는 데 천재적이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고급과 저급, 진지함과 농담의 경계를 뒤섞으며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내가 우울할 때 그의 영화에 손이 가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펄프 픽션〉을 처음 봤을 때 기억이 난다. 피투성이 갱스터들이 총격전을 벌이다가도 갑자기 햄버거 철학을 논한다. 말도 안 되는 대사인데도 진지하게 이어지는 그 대화 속에서 내 우울도 잠깐은 농담거리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무엘 잭슨이 연기한 줄스 윈필드의 걸쭉한 엄마를 찾는 욕 또한 정겹게 들리기까지 한다.
〈킬 빌〉의 세계는 더 노골적이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장면은 사실상 만화에 가깝다. 현실이라면 끔찍해야 할 장면인데 오히려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황당한 복수극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세상에 이런 불합리한 복수라도 허락된다면 내 우울 쯤은 견딜 만하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그리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노예였던 장고가 총을 들고 복수에 나서는 과장된 서부극. 현실의 부조리를 잠깐 대리만족으로 씻어내는 기분이 든다. 화면 속에서 정의가 과장되게 실현되는 순간 나는 현실의 억울함을 잠시 잊는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곁에도 늘 영화가 있었다. 며칠 동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밤 나는 킬 빌을 틀었다. 자극적인 음악과 칼부림, 끝도 없는 복수극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마음이 비워지는 경험을 했다.
다른 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분노와 우울이 뒤섞였을 때는 장고를 다시 꺼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유쾌한 복수극을 보고 있자니 내 억울함도 마치 스크린 속에서 총알 세례로 쏟아져 나가는 듯했다. 결국 영화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지만 나를 잠시 견디게는 해줬다.
B급 액션물은 내게 싸구려지만 확실한 진통제다. 치킨과 맥주처럼 값싸고 뻔하지만 힘든 날에는 그만한 위로가 없다. 피와 폭발, 허술한 대사들 속에서 마음이 가볍게 풀린다. 삶이 진지할수록, 영화는 가벼워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우울할 때 타란티노의 B급 액션물을 본다. 우울은 늘 찾아오지만, 과장된 액션과 싸구려 대사 한 편이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싸구려 위로’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편의점 라면, 누군가는 오래된 드라마, 또 누군가는 진부한 팝송. 내겐 그게 타란티노의 액션물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B급 취향이 우울을 잠시 비켜가게 해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