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카피라이터 피터 메일이 쓴 [나의 프로방스]를 읽으며 나는 프로방스에서 살기를 꿈꿨다. 원제는 [A Year in Provence](1989).
그 책 속에는 낭만적인 프로방스의 삶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글쓴이가 엉겁결에 프로방스 뤼베롱 산 옆에 있는 집을 사고 악전고투를 거치며 집을 수리하는 과정과 프로방스 시골에서 만난 재미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유쾌하게 펼쳐졌다. 그가 찾아갔던 식당을우리도 언젠가 가봐야지 하며 구글맵에 저장까지 해뒀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프로방스 여행 중에 에즈(Eze) 마을에서 만난 전통 시장의 풍경, 그라스(Grasse) 마을을 달리다 만났던 라벤더 밭이 떠올랐다.
정통 시장에 무심한 듯 진열된 허브와 형형색색 고운 빛깔로 예쁘게 놓여있던 과일들, 차를 몰고 가다 만난 보랏빛 라벤더 밭에 들어갔을 때 코끝에 스치던 은은한 향기.프로방스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유럽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이탈리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열다섯 권을 몇 번이나 읽으며 나는 로마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언젠가는 프로방스든 이탈리아 어딘가에서든 살아봐야지 라는 꿈을 품었다.
그때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 언젠가는 가야지 하는 다짐을 카톡 상태 표시에 써놨다.
프로방스에서 살까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살까 고민하면서 '미스트랄과 보라 중에'
라고.
미스트랄이란 알프스를 넘어 프로방스 지방에서 지중해 쪽으로 불어오는 강한 겨울바람이다. [나의 프로방스]의 첫 장 소제목이 '1월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이다. 따뜻한 프로방스 지방을 상상하며 집을 산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로 이사하자마자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 미치게 만드는 바람'인 미스트랄을 만난다.
보라는 알프스 쪽, 지중해의 북쪽에서 이탈리아 동쪽 아드리아해로 부는 겨울바람이다.
이제는 사라진 대한항공 마일리지 프로그램의 막차를 타고 두 차례의 꿈만 같던 세계일주도 잘 마쳤다.
적도에서 남극, 남미의 여름에서 영하 43도 극한의 알래스카까지 다니다 보니 준비할 것도 많고 너무나 피곤한 여정이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지만 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첫 번째 세계일주 때에는 이태리 살기 답사의 일환으로 마지막 경유지에 이태리 북쪽 피에몬테주에 있는 도시 쿠네오에서 일주일살기를 넣었다.
그때 다시 한번 확인했던 사실.
어떤 작은 도시, 마을이라도 이태리 마을에는 로마의 역사, 중세의 향기가 담겨있었다.
쿠네오의 화요시장이 열린 구도심 갈림베르티 광장을 가득 채웠던 가게들, 각양각색의 치즈와 프로슈터가 진열돼 있던 트럭들, 신선한 과일가게들.
가장 작아 보였던 마을 도글리아니의 성당 앞에 놓여있던 빅벤치와 아름다운 벽화.
이제는 돌아다니기보다 한곳에 집중하고 싶다.
오랜만에 다시 피터 메일을 검색해 보니 2018년 1월 미스트랄이 부는 계절에 8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사랑하던 프로방스에서 30년을 살고난 후에.
환갑이 넘은 지금 내게 남은 세월을 따져본다.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게 10년, 15년?
마음이 조급해진다. 늦기 전에 떠나야지.
J의 병원 일정은 6개월마다 돌아오니 1년 살기는 어렵다. 장미에 빠진 그는 봄가을을 집에서, 정원을 지켜야 한다니 또 겨울에 떠나는 수밖에.
말이 씨가 되는 건가.
프로방스의 미스트랄도 이태리의 보라도 둘 다 겨울바람이다. 이렇게 해서 올겨울엔 이태리에서 겨울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