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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생 뭐 있나? 그래 이탈리아에서 한 번 살아보자.

by Bora

40세를 막 지날 무렵 영국 출신 작가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를 읽으면서 나는 유럽살이를 꿈꾸기 시작했다.

내가 평생 터를 잡아온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나 먼 이국에서 살아본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


처음에는 피터 메일이 선택했던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가 내 유럽살이의 목적지였다.

<나의 프로방스> 속에는 낭만적인 프로방스에서의 삶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글쓴이가 엉겁결에 프로방스 뤼베롱 산 옆에 있는 집을 사고 악전고투를 거치며 집을 수리하는 과정과 프로방스 시골에서 만난 재미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유쾌하게 펼쳐졌다. '피터 메일이 찾아갔던 식당을 우리도 언젠가 가봐야지' 하며 구글맵에 저장까지 해뒀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나와 남편이 프로방스 여행 중 에즈(Eze) 마을에서 만났던 전통 시장의 풍경, 그라스(Grasse) 마을을 달리다 마주친 라벤더 밭이 떠올랐다.


전통 시장에 진열된 갖가지 허브와 형형색색 고운 빛깔로 예쁘게 놓여있던 과일들, 차를 몰고 가다 만난 보랏빛 라벤더 밭에 들어갔을 때 코끝에 스치던 은은한 향기. 프로방스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유럽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이탈리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열다섯 권을 몇 번이나 읽으며 나는 로마와 사랑에 빠져버렸었다. 서양 문명의 원천 로마, 멋과 맛이 살아있는 이탈리아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가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간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프로방스로 갈까? 아니면 이탈리아로 갈까? 그 당시 했던 고민은 아직까지도 나의 '카톡 상태메시지'에 남아있다. '미스트랄과 보라 중에'라고.


미스트랄(Mistral)은 프로방스 지방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강한 겨울바람이다. <나의 프로방스> 책 첫 장 소제목이 '1월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이다. 따뜻한 남쪽 지방을 상상하며 프로방스에 집을 산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로 이사하자마자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 미치게 만드는 바람'인 미스트랄을 만난다.

보라(Bora)는 발칸 반도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부는 겨울바람이다.


미스트랄이 부는 곳으로 갈 것인가? 보라가 부는 곳으로 갈 것인가?

정작 해외에 나가서 살 상황도, 능력도 안 됐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세월이 흘러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꿈꾸던 명예퇴직을 했다.

드디어 자유로워진 나는 남편 J와 함께 두 차례의 세계일주도 잘 마쳤다. 적도에서 남극, 남미의 여름으로부터 영하 45도, 극한의 알래스카까지 다니다 보니 준비할 것도 많고 너무나 피곤한 여정이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지만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제 내게 남은 세월을 따져본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게 10년? 15년?

마음이 조급해진다. 더 늦기 전에 떠나야지.

여행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또 하는 일 때문에 여기저기 많이 다니는 J는 내가 어디를 가자고 하든지 언제나 오케이다.


몇 달 살기는 거주지만 옮기는 것, 주거비만 추가된다고 생각하고 가능하면 비싸지 않은 곳을 찾기로 했다. 그렇다고 동남아로 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유럽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가 있는 곳, 문화와 예술이 흐르는 곳 유럽이.

첫 번째 세계일주 때에는 '이탈리아 살아보기' 답사의 일환으로 프랑스에 가까운 북부 지방의 도시 쿠네오에서 일주일을 지내봤다. 이탈리아 마을은 크기에 상관없이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로마의 역사와 중세의 향기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처음에는 적어도 1년은 살아봐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무엇보다 J의 장미 정원이 문제였다. 팬데믹 기간 동안 외국을 다닐 수 없었던 그는 집 마당에서 꽃을 가꾸기 시작했고, 뭐 하나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으로 인해 불과 몇 년 사이에 진지한 가드너, 특히 장미를 키우는 로즈 가드너가 되어 있었다.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장미를 내팽개쳐두고 장기간 집을 비울 수 없다는 J 때문에 기간을 조정해야 했다. 결국 가드닝을 하지 않는 시기인 겨울철에 이탈리아에서 살아보는 것으로 결정됐다. 프로방스의 '미스트랄'도 이탈리아의 '보라'도 둘 다 겨울바람이다. 말이 씨가 된 건가.


어쩌다가 2년 동안에 두 번씩이나 세계 일주를 하고, 그 사이에도 길고 짧은 여행을 몇 차례 하다 보니 요즘 주위에서 듣는 말이 '그 댁은 돈이 많으신가 봐요'다.

그럴 리가!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가 여행이라서 나머지 비용을 최소화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모를 뿐이다.

난 옷을 제대로 사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여행지에서도 교통비, 식비를 아끼기 위해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저녁 식사는 간단하게 장을 봐서 숙소에서 해결한다. 오랫동안 J가 모아둔 항공사 마일리지가 상당한데, 내가 퇴직하기 전에는 여행이 가능했던 기간이 성수기라서 어차피 마일리지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무 때나 가능한 날짜를 찾으면 되니 그동안 모아둔 것만으로도 앞으로 꽤 많은 마일리지 여행이 가능하다.


부킹닷컴에 목적지를 이탈리아로 하고 원하는 날짜를 넣는다. J가 요구한, 정원의 겨울 준비가 끝나고 마일리지 항공권이 가능한 일정을 잡다 보니 한 달 살이가 40일로 늘어났다. 부킹닷컴이든 에어비앤비든 한 달이 넘으면 할인율이 꽤 올라간다.

한 달 넘게 살아야 하니 주변과 동떨어진 집, 큰 도로에 붙은 집은 패스, 대중교통으로 다녀야 하니 외진 곳 패스, 도시가 아니라도 적당한 크기의 마을이 있고, 걸어서 빵 사고 커피 마시며 장 보러 다닐 수 있는 곳으로, 교통이 좋아 가끔 다른 지방 나들이가 가능한지 경로도 꼼꼼히 따져봤다.


그렇게 찾은 곳이 로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피우지(Fiuggi) 마을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로마에서 대중교통도 가능하고 물이 좋은, 온천 마을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 여기야!'하고 예약을 한 후 마일리지 항공권을 발권한 게 2024년 3월, 이리아 살기 9개월 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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