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 주민센터 부근에 작지만 재미있는 세 군데 가게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각기 요리, 언어, 미술을 전공한 세 자매가 귀국하여 운영하는 가게들이다.
맏언니가 운영하는 알리멘타리 꼰떼는 이탈리아 식료품점, 둘째가 운영하는 보테가 꼰떼는 와인과 소품샵, 그리고 막내가 운영하는 트라토리아 꼰떼는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이다.
이탈리아 살아보기를 앞두고 꽤 오래 한국을 떠나니만큼 어떤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고 여행을 시작할 것인가 고민하던 우리 부부는 트라토리아 꼰떼에 들러 맛있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먹었다. 마지막으로 김치찌개를 먹고 여행을 시작했다간 여행 기간 내내 한국 음식 생각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아예 철저한 이탈리안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해외에서 몇 년씩 산 분들에 비하면 우리의 이번 이탈리아 살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평생의 삶에서 가장 길게 집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 비장함이랄까 그런 마음까지도 있었다. 특히 출발 직전 나라를 휩쓴 대통령의 자승자박 셀프 내란으로 인해 우리가 여행 계획을 밀고 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었다.
저녁 시간에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원활하게 모든 것이 진행됐다.
시내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아침 테르미니 역 앞에서 출발하는 피우지 행 버스를 탔다.
나는 장기 여행을 떠나면 점심은 맛집을 찾아다니지만 저녁은 거의 숙소애서 밥을 직접 해 먹는다. 저녁을 집에서 먹으니 피로도 덜하고 식비가 절약되는 데다 과식을 하지 않아 건강에도 좋다. 미국과 유럽이 함께 포함됐던 세계일주 때는 밥솥도 100V 용과 220V 용, 두 가지를 챙겼다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떠나며 100V 밥솥은 호텔에 남겨뒀었다.
이번 이탈리아 살기 기간 동안 현지 식당도 많이 이용하겠지만 한 곳에 '살려면' 주로 해 먹어야겠다 싶어서 J가 좋아하는 별식도 다양하게 챙겼다. 겨울철이라 기온이 낮으니 그게 가능했다.
- 언니한테 얻어온 김장김치
- 풀무원 비빔냉면, 목란짜장면, 전주베테랑만두
- 새해 첫날 먹을 떡국용 떡
- 된장,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 참기름, 동전육수
- 쌀과 현미, 잡곡
쌀과 현미까지 넣으니 음식 무게가 10kg을 훌쩍 넘는다.
처음에는 음식을 단프라 박스에 넣어 가져갈까 했으나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대중교통 이동이 어려울 듯싶어 고심하다 캐리어를 생각해 냈다.
이탈리아에만 있다가 귀국한다면 짐 싸기가 간단할 텐데 6주 살기가 끝난 후 튀니지와 북유럽 오로라 여행까지 예정하는 바람에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음식은 가지고 가면 다 없애고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낡은 캐리어에 식재료를 담아갔다 캐리어를 현지에 버리고 오는 방법이 생각났다. 마침 창고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오래된 두 바퀴 굴림형 삼소나이트 26인치 캐리어가 있었다. 갈 때만 조금 고생하면 이탈리아 사는 동안 먹거리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세계일주 때보다 더 많은 짐을 끌고 나서게 됐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로마 숙소를 경유하는 동안 끌고 다녀야 할 짐이 걱정이었으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바퀴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 모두 합쳐서 90kg에 달하는 무게가 담긴 몇 개의 캐리어를 한 번에 끌고 가야 했지만 캐리어들이 스르르 잘도 미끄러져 가니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피우지 행 버스가 출발한 후 조금 여유가 생기자 한국의 기막힌 현실,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속보가 궁금해 자꾸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동 중에 LTE로 데이터를 마구 쓸 수는 없어 차창밖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중부 이탈리아는 지금이 단풍철이다. 한국에 비하면 대략 2주 정도 늦은 것 같다. 피우지 버스 터미널에 도착, 300 미터 떨어진 숙소까지 캐리어를 끌고 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와이파이부터 연결하여 국내 상황을 확인했다. 새록새록 나오는 뉴스가 기막힘을 더해준다.
출발 며칠 전 터진 대통령의 자폭 계엄과 그 후폭풍으로 인해 국민 모두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가운데 우리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환율은 갈수록 천정부지에다 이런 시국에 나 몰라라 여행을 떠난 처지이니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 사실을 말하기조차 난감했다. 그저 다들 피해 덜 보기를,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길 바랄 뿐.
피우지 시내 한가운데 주상복합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우리의 아파트형 숙소는 보고 또 봐도 최고의 장소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썰렁한 로마보다 (아직 직접 확인은 안 했지만 로마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없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거리 장식도 밤이 되면 아름다울 것 같다.
피우지엔 아직까지도 하얗고 빨간 시클라멘 꽃이 거리 화단에 피어 있어 크리스마스 시즌을 반긴다. 겨울철이지만 장미도 남아있고 단풍이 든 채 매달려있는 나뭇잎을 보니 여기가 서울보다 따뜻하긴 한 것 같다.
첫날은 먹거리 확보를 위해 장을 보기로 했다.
장기간 거주해야 하니까 푸짐하게 장을 보려고 캐리어를 끌고 시내에서 가장 크다는 시그마 마트에 갔다. 어느덧 비는 그치고 찬란한 태양이 돌아왔다. 파란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빛난다.
천천히 동네 구경을 하며 시그마 슈퍼에 도착하니 문이 안 열린다. 오후 1시 반부터 4시까지는 쉰단다. 오전에 문을 열고 낮에 쉬었다 저녁에 다시 문을 여는 슈퍼라. 나는 이렇게 쉬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 주는 나라들이 좋다. 여유 있고 넉넉해 보인다. 덕분에 오후 시간이 기다림으로 늘어졌다.
시차로 인해 딱 졸릴 때라 "자면 안 돼"를 서로에게 주문하며 버텼다.
4시가 되어 다시 찾아간 시그마 푸드마켓에는 있을 건 웬만큼 다 있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서울의 동네 마트가 그리워지는 딱 그런 슈퍼.
구글맵에 '큰' 슈퍼라며, 로마보다 싸다며 좋은 반응을 남겼던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의 리뷰를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피우지는 천정부지로 비싼 로마의 숙박비를 피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로마 외곽에 묵으며 로마 관광을 하는 우리나라 패키지 투어의 숙박지로 애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에 한국 패키지 투어 관광객들의 시그마 슈퍼 경험담이 꽤 올라와 있는데 내가 그만 그걸 홀딱 믿은 것이다.
살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과일 코너로 가 사과 3종 (서울 집 냉장고에 두고 온 감홍사과를 그리워하며 한국 사과와의 비교를 위해), 귤 한 봉다리, 그리고 푸르뎅뎅한 바나나를 샀다. 야채는 토마토(이탈리아 마트에서 이처럼 찌질한 토마토 코너는 처음 본 듯), 양파, 통마늘(서울서도 귀찮아 깐 마늘만 사는데), 버섯, 아스파라거스, 감자 한 뭉치, 그리고 루꼴라와 상추류를 샀다.
유럽에 오면 가장 만족스러운 야채는 루꼴라다. 어찌나 향도 좋고 싱싱하며 맛도 좋은지.
이탈리아의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꼭 준비돼 있다는 피우지 생수도 샀다.
호기롭게 '한 박스 주세요!'하고 가격을 보니 한 병에 1.2유로, 2천 원이 넘는다. 마음 약한 J가 딱 한 병만 넣었다. 그러면서도 와인은 세 병씩이나 담아왔다. 물보단 술?
사나흘짜리 일반적인 여행이라면 구입을 할 상상조차 못할 물품, 냄비도 하나 샀다. 숙소의 냄비가 하나같이 코팅이 벗겨져 있어 찜찜한 데다, 맛없는 여행용 전기밥솥으로 짓는 밥에 불평을 늘어놓던 J가 직접 냄비밥을 해 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도 냄비밥 타령을 하길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으므로 먹고 싶으면 직접 하라고 했더니 그러마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냥 편하게 살지 뭔 대단한 맛을 찾겠다고 호기롭게 나서는 건지, 내 일이 아니니 그저 지켜보기나 해야지.
시그마 푸드마트에서 28인치 캐리어 가득, 물과 술, 과일과 야채, 티슈와 냅킨 등을 사서 끌고 왔다.
모두 냉장고에 쟁인 후 쌀을 불리다가 "근데 오늘 저녁은 뭘 먹지?"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시그마 푸드마트엔 고기가 없었다. 해물도 꽁꽁 얼린 덩어리 몇 가지 뿐.
"지난번 답사 때 가보고 그저 그랬던 콘래드 슈퍼에 가 볼까? 거기엔 고기가 있었지? 시그마보단 나을까?"
구글맵을 찾아보니 1.1킬로, 걸어서 15분이다. 시차 때문에 지치고 졸린 우리에게 지금 왕복 30분은무리다. 그런데 가는 길에 또 하나의 슈퍼가 있었다. 데코 슈퍼메르카티. 평점도 좋다. 거기까진 걸어서 8분, 550미터.
가 볼까?
빈 배낭을 울러메고 길을 나섰다. 도심 반대편 길로 주욱 따라가면 된다. 몇 걸음 걷자니 5성급 호텔인 팔라쪼 피우지 호텔이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있다. 지난달 말 피우지에서 열렸던 G7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한 각 나라 외교부 장관들이 묵었던 곳이다. 팔라쪼 피우지를 지나자 성탄 거리 조명도 끝나고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진다. 길 끝에 슈퍼가 보인다. 규모도 시그마보다 커 보이고 주차장도 있고 차도 좀 있다.
"괜찮아 보이는데?"
들어서니 활기찬,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런 이탈리아 슈퍼다!
입구부터 포인세티아 화분이 빨간 잎을 반짝이며 유혹한다. 서울에서 매년 겨울이 가까워지면 나는 포인세티아 화분 세 개로 식탁 위에 연말 장식을 했었다.
"우리 이거 살까?"묻는 J에게 노!
바질 화분이라면 한 달 살면서 뜯어먹기라도 하지, 창문만 열면 광장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조명이 반짝이는 숙소에 사는데 굳이 왜? 평생 식물에 관심이 없던 J는 팬데믹 때 가드너로 변신한 이후 꽃만 보면 사다가 키우려고 하는 통에 아주 골칫거리다.
이 슈퍼는 입구부터 마음에 들었다. 시그마에서 못 산 대파 한 묶음과 맛있게 생긴 바나나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치즈 코너와 생 햄 코너, 고기 코너가 별도로 있다!
"그래, 바로 이게 이태리 마트지! 시그마, 이제 너네 가게에선 물만 사겠어!"
신나게 치즈 코너를 향해 달려갔다. J에게 '스테이크용 쇠고기 300g 주세요'를 구글번역기로 써서 구입하라 하고 나는 치즈와 프로슈토를 살펴봤다.
유럽의 마트는 안에 들어가면 아예 인터넷이 안 되는 곳이 많다. 인터넷이 안되면 실시간 통역기도 먹통이 된다. 그나마 미리 이탈리아어를 다운받아둔 오프라인 번역기가 있어 벙어리 신세는 면했다.
질 좋은 DOP(요게 붙으면 품질 보증이라고 한 걸 본 것 같다.) 올리브오일이 보이길래 한 병 샀다. 발사믹은 모데나를 잡았다가 J의 반대로 내려놨는데 다시 사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치즈 한 조각(이건 내가)과 프로슈터(이건 J가)를 골라서 샀다.
나오면서 J가 불러서 가보니 빨간 체크무늬 테이블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숙소 테이블보가 마음에 안 드는데 이거 어때?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나고."
좋지! 한 달간 밥을 먹으면서 식탁보가 별로라 새로 살까 했었는데 잘 찾았군. 나는 이미 크리스마스 문양 냅킨을 바구니에 넣었지롱!
아까 시그마에서 거의 100유로, 여기서도 50유로, 첫날 장 본 것만 20만 원을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 장바구니 물가가 워낙 올라서 식재료비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나마 맛있는 스테이크 300g이 5유로 밖에 안 하니 위안을 삼아야 하나?
마트의 운영시간도 확인해 봤다. 매일 8시 반부터 밤 8시까지, 심지어 일요일도 9시부터 1시까지 연다. 아싸!
아까 시그마는 오후 쉬는 시간 있어서 보기 좋다더니 이 자기중심적 이율배반의 사고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