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준 처음 숙소의 주인 로산나는 꼬불꼬불 긴 갈색 머리에 나이가 조금 든 씩씩하고 스타일리시한 이태리 여자다.
함께 탄 차에서 슬슬 호구조사를 해 봤다.
이 못 말리는 나이 든 자의 호기심이란.
"여기서 태어났니? 이 집은 왜 판 거야?"부터.
거리끼지 않고 대답을 해주니 이야기가 술술 진행된다. 답하기 복잡한 내용은 AI번역기를 대주면 빠른 이태리어로 얼마나 자세하게 말해주는지 대화에 막힘이 없다.
피우지에 산 지는 10년, 그전엔 남부 나폴리에서 살았고, 태어난 건 로마라고 한다.
이 집은 3만 유로에 팔았다니 5천만 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위치가 제 값을 받을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로마에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갈 수 있는 수도권의 13평 아파트가 5천만 원이라니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한 셈이다.
숙박업은 여기서 10년을 했는데 이제 그만두고 부동산업을 하려고 한다고.
'아하, 그래서 다른 숙소도 알고 있었던 거군.'
사는 집도 가까우니 이제 곧 이웃이 될 수 있다.
나중에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봐도 되냐고 하니 시원하게 "물론이지." 한다.
든든한 이웃을 하나 얻었다.
일단 필요한 정보를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물어봤다.
쿠네오 화요 시장이 생각나서
"피우지에 전통 시장이 있니?"
하고 물으니
"매주 목요일에 있어."
"어디서 하는데?"
"시청 앞 광장 뒤쪽인데 지금 보여줄게."
하면서 모닝의 액셀을 지그시 밟는다.
우리가 도착하는 건 12월 초.
이태리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맞게 된다.
"이 동네에 크라스마스 마켓은 있니?"
"이태리 중부, 남부엔 없어.
북부 밀라노 쪽에나 있으려나?"
그렇군. 크리스마스 마켓은 좀 더 추운 곳, 위쪽 나라에서만 열리나 보다.
사실 유명하다는 비엔나 크리스마켓을 작년에 다녀왔던 지인 말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고, 우리나라가 더 화려하다고 한다. '유럽의 크라스마스'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이 아닐까도 싶다.
요건 못 보게 된 자의 자기 위안?
피우지를 오가는 버스에서 방글라데시, 인도 계통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고 했더니 정치는 관심 밖이지만 외국인들을 무작정 받아들여 문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구글에서 피우지의 역사를 찾아봤다.
로마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마을로 로마의 주요 가문의 영지로서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교황령의 일부였다고 한다.
고대 개인 궁전과 로마 시대 교회 등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 마을을 가지고 있으며, 20세기 초에 계곡 아래쪽에 상류계층을 위한 온천과 관광 시설이 세워지면서 호황을 맞다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침체기에 접어든 곳이란다.
우리가 걸었던 산 위쪽 센트로에 있던 교회가 로마 시대에 세워졌고 좁은 골목길과 아름다운 광장 또한 수천 년 역사를 품고 있다니 바닥의 돌 하나, 차곡차곡 쌓여있는 벽돌까지도 예사롭게 보지 않으며 세월의 더께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게 될 계곡 아래쪽의 역사까지 알게 되니 피우지에 대한 애정이 소록소록 솟아오른다.
처음 피우지의 숙소를 예약한 후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내용은 피우지의 물이었다.
[ 피우지 마을은 천연 샘과 산에서 흘러나오는 Acqua di Fiuggi(피우지 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물은 14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 구글 펌
맛있는 피우지 생수를 박스로 사서 먹겠다고 선언하는 J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쯤이야!
비록 온천은 할 것 같지 않지만 잠깐의 샤워 만으로도 밤새 보들거렸던 피우지 물이 기대된다.
이번에 피우지를 찾아오며 구글맵에 버스 정보가 나오지 않아 땀을 뺐었다. 실제로 뭐든지 정확하기만 할 것 같은 독일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숙소에 못 돌아갈 뻔한 적도 있고, 열차가 갑자기 운행이 중지되어 몇 시간을 헤맨 적도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이제는 우리에게 보기 힘들어진 고전적인 생활상도 적지 않다. 큰 호텔이 아니라면 숙소의 열쇠는 쇠로 된, 꽂아서 돌리는 옛날 열쇠가 대부분이다. 신용카드를 받지 않고 현금만 받는 곳도 제법 있다. 유로 동전과 다양한 종류의 센트 동전이 지갑에서 찰랑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피우지만 해도 고작 이틀 지냈지만 식당이나 카페에서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기가 힘들다. 식당에서는 식사에, 카페에서는 차 마시는데 집중하라는 걸까?
이태리에서 버스표는 담배가게에서 판다. 물론 태그리스 카드도 되는 대도시가 늘고 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는 현금만 통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아날로그 방식이 나는 좋다.
구글맵 덕분에 세계 어디서든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버스 운행 시각도 터미널 앞 식당과 시청 앞 광장의 버스정류장에 붙은 종이를 보며 챙겨야 한다.
피우지 버스터미널에서 우리의 새 숙소까지는 평지로 300m, 아름다운 거리다.
윗동네 시청 앞 광장까지도 하루 대여섯 번 시내버스가 다니니 단돈 1유로만 내면 시간 맞춰 동네 마실 가듯 느긋하게 다닐 수 있다.
로마 떼르미니역으로 가는 시외버스도 나가는 건 첫차가 5시, 돌아오는 건 밤 8시 반이니 로마 근교에서 저녁까지 놀다 돌아올 수 있다. 일요일에는 세 번만 운행하는 것도 인간적이다. 기사도 쉬어야지!
6주를 살면서 몇 번 정도는 이딸로 기차를 타고 이태리의 멋진 도시를 찾아 1박 2일 장거리 국내여행도 해야겠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로마 나들이를 해야지. 이참에 로마의 구석구석을 다녀봐야겠다.
피우지의 윗동네 마실도 한 주일에 두어 번은 갈 거다. 인생 퐁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먹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