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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피우지란 곳은...

by Bora

결과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준 처음 숙소의 주인 로산나는 꼬불꼬불 긴 갈색 머리에 나이가 조금 든, 씩씩하고 스타일리시한 이탈리아 여자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슬슬 호구조사를 해 봤다.

"피우지 마을이 고향인 거야? 우리가 예약했던 집은 왜 매매를 한 거야?" 등등.

거리낌 없이 대답을 해주니 이야기가 술술 진행된다. 답하기 복잡한 내용은 AI 번역기를 대주면 빠른 이탈리아어로 얼마나 자세하게 말해주는지 대화에 막힘이 없다.


로산나가 피우지에 온 지는 10년, 그전엔 나폴리에서 살았고, 태어난 곳은 로마라고 한다.

우리가 묵는 집을 3만 유로에 팔았다니 5천만 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어중간한 위치 때문에 제 값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로마까지 한 시간 반 만에 갈 수 있는 수도권의 15평 아파트 가격이 5천만 원이라니!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정말 저렴한 셈이다.


이 집으로 에어비앤비 숙박업을 10여 년 했는데 이제 그만두고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란다.

'아하, 그래서 시내의 다른 숙소 정보까지 알고 있었던 거로군'

로산나는 사는 집도 가까우므로 이제 곧 이웃이 될 수 있다.

나중에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봐도 되냐고 하니 시원하게 "물론이지" 한다.

든든한 이웃을 하나 얻었다.


일단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필요한 정보를 몇 가지 물어봤다.

"피우지에도 전통 시장이 있나?"

- "매주 목요일에 열려"

"어디서 하는데?"

- "시청 앞 광장 뒤쪽인데 지금 가서 보여줄게"

그러더니 모닝의 액셀을 밟는다.


우리는 이 마을에 12월 초 도착 예정이다. 피우지에 있는 동안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맞게 된다.

"이 동네도 크라스마스 마켓이 열리나?"

-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없어. 밀라노 위쪽으로나 가야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군. 크리스마스 마켓은 좀 더 추운 곳, 윗동네에서만 열리나 보다.

유명하다는 비엔나 크리스마켓을 다녀왔던 지인 말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고, 우리나라가 더 화려하다고 한다. 작년 세계일주 중에 봤던 리스본과 마드리드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사실 실망스러웠다. '유럽의 크라스마스'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이 아닐까도 싶다.


로산나에게 '피우지를 오가는 버스에서 방글라데시, 인도 계통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라고 했더니 '정치는 관심 밖이지만 이탈리아가 외국인들을 무작정 받아들여 문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로마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살인적인 로마의 숙박비 때문에 출퇴근이 가능한 피우지에서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피우지의 역사를 찾아봤다.

피우지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온천 도시이다. 로마 주요 가문의 영지로서 통일 이탈리아가 수립될 때까지는 교황령의 일부였으며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 마을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 계곡 아래쪽에 상류 계층을 위한 온천과 관광 시설이 세워지면서 호황을 맞다가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침체기에 접어든 곳이다.


피우지는 산 위에 있는 '피우지 시타'(Fiuggi Cita)와 산 아래의 '피우지 폰테'(Fiuggi Fonte)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피우지 시타는 로마 시대부터 있던 산꼭대기 마을이고, 피우지 폰테는 온천 개발과 함께 집들이 들어차기 시작한 아래 지역이다.


피우지 시타 구시가는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급경사에 건설되어 계단이 상당히 많다. 중세 이래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작은 교회와 주변의 좁은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바닥의 돌 하나, 차곡차곡 쌓여있는 벽돌까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세월의 더께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온천을 중심으로 번성하게 된 피우지 폰테는 상대적으로 평지에 발달했다. '폰테'는 분수라는 뜻이다. 온천이 있기 때문에 시내 여기저기에 분수가 솟아오른다. 온천을 중심으로 하여 크고 작은 수많은 호텔들이 자리 잡고 있다. 중세시대부터 이어지는 이 숙박업소들은 호텔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스파의 기능까지 함께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피우지 온천 원탕에는 목욕 시설이 아예 없고 온천욕을 하려면 이런 숙박업소를 이용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살게 될 계곡 아래쪽 피우지 폰테의 역사까지 알게 되니 피우지에 대한 애정이 소록소록 솟아오른다.


처음 피우지의 숙소를 예약한 후 구글에서 피우지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내용은 피우지의 생수였다.


[ 피우지 마을은 천연 샘과 산에서 흘러나오는 Acqua di Fiuggi(피우지 물)로 유명해졌다. 이 물은 14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구글 펌


여기 사는 동안 맛있는 피우지 생수를 박스로 사서 먹겠다고 선언하는 J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쯤이야!


이번에 피우지를 찾아오며 구글맵에 버스 정보가 나오지 않아 땀을 뺐었다. 구글맵 덕분에 세계 어디서든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됐지만 여기에서는 버스 운행 시각도 터미널 앞 식당과 시청 앞 광장의 버스정류장에 붙은 종이를 보며 챙겨야 한다.

피우지 버스터미널에서 우리의 새 숙소까지는 평지로 300m, 아름다운 거리다.


윗동네인 피우지 시타에 자리잡은 시청 앞 광장까지도 하루 대여섯 번 시내버스가 운행하므로 단돈 1유로만 내면 시간 맞춰 동네 마실 가듯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로마 테르미니 역을 운행하는 시외버스는 나가는 첫차가 새벽 5시, 돌아오는 막차가 밤 8시 반이다. 버스 시간만 잘 숙지한다면 로마에서 저녁까지 놀다 돌아올 수 있다. 일요일에는 운행 횟수가 세 번으로 줄어드는 것도 인간적이다. 운전기사도 쉬어야지!


6주를 살면서 몇 번 정도는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의 멋진 도시를 찾아 1박 2일 장거리 국내여행도 해야겠다. 그리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당일치기 로마 나들이를 해야지. 이참에 로마의 구석구석을 다녀보려고 한다. 피우지의 윗동네 마실도 한 주일에 두어 번은 갈 거다. 인생 퐁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먹어줘야지.

다시 새로운 계획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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