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 달을 살려던 이 집은 집 구조나 편의시설은 괜찮은데 완전 북향에 반지하라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세탁기가 있길래 오랜만에 밀린 빨래를 했지만 거의 마르지 않았다.
기온은 15도라는데 음침하고 썰렁하여 집안에서도 점퍼를 입고 있어야 했다.
날이 참 흐리군 하면서 대성당 쪽 찜해둔 식당으로 가기 위에 문을 나서자 세상에!
바깥세상은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집에서 겨울을 날 뻔했으니.
생각할수록 집을 팔아버린 로산나가 고맙고 이 답사가 천운인 듯싶다.
한 달 살기 하는 집을 직접 보고 정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장소가 이역만리 이태리인데.
이번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사야겠다.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 대성당 주변 중심가, 센트로로 향했다. 성당 앞 광장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활기찬 마을 모습이 펼쳐진다. 시청 앞 주차장엔 빨간색과 검은색 페라리가 빼곡하다. 극장 앞 고풍스러운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일요일을 맞아 모두들 출동한 건가? 어쨌든 아랫동네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모습이 내가 꿈꾸던 한 달 살이 풍경인데.
성당에서는 혼배미사가 열리고 있다. 장미꽃으로 장식된 문을 지나 미사를 살짝 들여다봤다. 소박한 동네 결혼식.
가까운 이들이 모여 차분하게 미사를 드리는 중이다. 따뜻하고 수수한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성당을 낀 예쁜 골목길을 돌아 어제 찜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막 문을 연 식당은 분위기도 근사하다. 하나둘씩 손님이 들어서더니 금세 자리가 차 버렸다. 일찍 와서 다행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구글 리뷰에서 추천받은 버섯 퐁듀와 과일 샐러드, 생면 파스타를 시켰다. 와인도 두 잔. 클래시코 와인 한 잔에 3유로, 가격도 이쁘다.
미리 준비해 뒀는지 바로 샐러드와 퐁듀가 나오는데 오오 이 퐁듀 맛이란!
그는 내 인생 최고의 퐁듀라고 극찬이다. 몇 번 먹어봤냐고 물으니 퐁듀가 처음이란다. 흠.
난 서촌에 있던 스위스 식당의 짜디짠 퐁듀와 절로 비교가 됐다. 버섯 향이 물씬 나며 치즈의 풍미가 감도는 것이 빵에 찍어먹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퐁듀를 또 먹을 수 없는 게 너무나 아쉽다.
전채 요리를 싹 다 비우고 나니 배불러 맛있는 생면 파스타는 다 먹을 수가 없다.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선 후 커피는 광장에 있는 극장 카페에서 마시기로 했다.
아까 꽉 찼던 인파와 차들은 어디로 갔는지 광장은 한가롭기만 하다.
카페 벽에 붙어있는 사진이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이 카페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머리 하얀 멋쟁이 이태리 아저씨가 내려준 카푸치노 맛은 이태리 본연의 맛, 게다가 쿠키는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한지.
내일 로마로 나가는 교통편이 불안하여 버스 터미널에 들렀다 집으로 가기로 했다.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30분쯤 걸어갔다. 내리막이라 걷기는 힘들지 않은데 다시 숙소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 살짝 겁이 난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마다 우회적으로 비난을 해대는 J가 한마디 한다.
"어쩌자고 이런 듣보잡 마을을 찾아낸 거야. 안 되겠어 믿고 맡겼더니. 이젠 내가 좀 나서야지."
그래 새로 정한 바리의 숙소는 자기가 주장했으니 어디 보자고. 흥!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멋모르고 12월에 왔다가 어쩔 뻔했나. 30분을 걷는 동안 도로에는 버스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전 답사 오길 정말 잘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취소를 당해도 문제,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도 더 문제였으니.
도착하고 보니 버스 터미널 앞에는 피우지의 상징인 피우지 온천이 있었다. 공원처럼 넓고 입구부터 멋지다.
일단 터미널 앞의 식당에 가서 시간표를 물어봤다. 문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사진 찍고 확인해 보니 내일 10시 반에 떼르미니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우리 비행기가 3시 출발이니 조금 빡빡하지만 그 앞 시간 버스는 새벽 6시 반이라 너무 이르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찾다가 30분 거리의 아나니 역으로 가는 8시 반 버스를 찾았다. 아나니역에서 떼르미니역까지는 매시간 가는 걸 확인했으니 이걸 타기로 했다. (결국 다음날 8시 반에 와서 아나니역의 기차가 제시간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터미널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10시 반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집 앞을 경유하며 대성당과 시청이 있는 센트로로 가는 시내버스도 한 시간 정도 간격으로 운행한다. 버스요금은 기사에게 1유로 주면 된단다.
느긋하게 온천을 구경하고 시간 맞춰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기로 했다.
온천표를 사니 피우지라고 적힌 종이컵 하나를 준다. 여기다 온천물을 먹으라는 거다. 산책로는 고즈넉하고 사람들은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다.
온천이라니 목욕을 할 수 있는 원탕도 있겠지?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급하게 원탕을 찾았다. 산책로 아래쪽에 근사하게 생긴 건물이 보인다. 저기 있었네 하며 들어갔지만 거기에도 그림이 전시돼 있는 전시장 같은 멋진 공간에 마시는 물 공급하는 곳 밖에 없다.
나중에 로산나에게 물어보니 이 온천은 물을 마시기만 하는 곳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온천탕을 즐기려면 호텔의 스파에 가야 한단다.
시간 맞춰 나타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버스 시간만 맞추면 다닐 만하다.
로산나에게 내일 아침 8시까지 와달라고 부탁하러 부킹닷컴을 여니 메시지가 와 있다. 부탁했던 더 좋은 장소의 집을 갖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비슷한 가격에 해줄 수 있다고.
동남쪽 멀리에 있는 바리로 갈 것인가, 피우지에 머물 것인가 결정을 해야 한다. 바리는 다른 도시를 가려면 일단 로마행 이딸로 기차로 몇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데 피우지는 로마에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데다 시간표가 있으니 충분히 시간 맞춰 다닐 수 있다. 로마에 가면 다른 도시 다니기도 좋다. 집 위치만 괜찮다면 피우지가 최선의 선택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바리보다 숙박비도 훨씬 싸다.
위치를 보자고.
일단 그 집에 가보기로 했다. 메시지를 보내니 5분 만에 로산나가 총알과 같이 나타나 문을 두드린다. 모닝차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보니 새로운 아파트는 바로 버스 터미널 인근의 호텔과 가게들이 늘어서있는 중심가에 있다.
집 앞에 필요한 가게들이 골고루 있고 사람들도 적절히 있어 활기찬 동네다. 이 정도 위치면 일단 합격.
제법 큰 건물에 내부를 새로 리모델링한 아파트는 부엌은 좀 좁지만 다른 곳은 나무랄 데가 없다. 창문을 여니 사람들이 앉아있는 공터와 활기찬 길이 보이고 밖이 환한 게 햇빛도 받을 수 있겠다.
중요한 와이파이는?
한 달이 넘게 살면서 인터넷이 안 되면 절대로 안 되지.
현재는 그 방에 모뎀이 없지만 그때는 설치해 줄 수 있다고 한다. 모뎀이 다른 방에 있다고 해서 함께 가서 확인까지 했다. 인터넷 속도 좋고!
그제야 로산나가 변명하듯 말한다.
"우리 집 와이파이도 모뎀이 고장 나서 인터넷이 안 되는 건데 고칠 수가 없어. 한 번 고장 나면 고치기가 쉽지가 않아."
그래서 안 되는 거였군.
몇 달 전 예약할 때는 된다고 나왔던 거고.
"한국은 인터넷 고장 나면 그날로 고쳐주는데"
했더니 부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좋아. 이 집으로 하자.
이 집주인 클라우디오는 지금 로마에 있단다. 삼자 통화에 AI 통역기를 동원하여 대략의 금액을 협의했다. 삼성 AI 통역기는 이태리어를 바로 한국어로 하면 거의 외계어 수준이지만 영어로 하면 제법 정확하게 의사소통이 된다.
그래 우리의 운명은 여기였어!
저녁을 먹으며 클라우디오와 왓쯔앱으로 협의하여 처음 5일과 마지막 5일은 부킹닷컴으로, 중간 기간은 나중에 만나서 현금으로 주기로 했다. 40일 숙박에 약 1700유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