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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Oct 18. 2024

이태리 한 달 살기 3

준비 2 - 예약해 둔 집이 팔렸단다

우리가 내린 피우지 버스터미널에선 숙소 주인 로산나가 현대 모닝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여기서부터 숙소까지 대중교통으로 다녀야 하니 터미널에서 시간표 등을 알아보고 싶지만 일단 로산나의 모닝에 올라탔다.


모닝은 급커브를 돌리며 꼬불꼬불한 경사길을 계속 올라간다. 피우지는 완전히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었다. 언덕길을 올라 외진 골목 끝으로 들어가더니 연립주택 같은 곳에 차를 댄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집 구조도 나쁘지 않다.


'괜찮군, 그런데 교통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로산나가 말했다.


"12월에 정기예약한 사람 맞지? 근데 이 아파트가 팔려서 그 예약은 취소해야겠어."

"뭐라고?"

오 마이 갓. 이런 황당할 데가!

이태리까지 와서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했다.


"아파트를 산 사람이 빌려주면 안 될까?"

"그 사람이 들어와 산대.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혹시 동네에 비슷한 집 빌려줄 사람 알아봐 줄 수 있을까?"

"한 번 알아는 볼게."

"근데 와이파이 비번은 뭐야?"

"와이파이 안돼."


'헐. 무슨 소리야! 분명히 무료 와이파이 가능한 곳으로 찾았는데 무슨 말이지?'

급하게 부킹닷컴을 열어서 이 집의 시설을 확인하니 [인터넷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이걸 못 볼 수 있지?


가끔씩 터뜨리는 치명적인 실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났지만 이번엔 오히려 이렇게 문제가 해결된 셈이 됐다.

'다행이다. 취소돼서. 교통도 안 좋은 것 같은데 잘 됐어. 집은 새로 찾아보지 뭐.'


행운인지 불운인지 둘 다 온 것 같은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달래며 짐을 풀고 동네를 돌아볼 겸 슈퍼에 가기로 했다.

예약하기 전 확인했던 가까운 슈퍼는 구글맵에 4시에나 연다고 나온다. 그다음 거리의 슈퍼는 1.2km, 걸어서 16분이란다. 거기라도 가야지 싶어 장바구니를 들고 길을 나서니 제법 경사진 언덕길로 계속 내려가야 한다.


이걸 다시 올라와야 하는 거야?

한숨을 쉬며 걸어가려니 동네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가게도, 사람도, 버스도 보이지 않고 고양이 몇 마리만 길 가에 시름없이 앉아 있다.


슈퍼는 중간 규모의 시골 슈퍼로 웬만한 건 다 있지만 빵이 없다. 이틀 치 장 본 걸 울러 매고 걷다 허름한 바, 카페 비슷한 곳에 들어가 보니 비닐에 담긴 크라상이 딱 두 개 남아있다.


하나에 1.2유로, 1800원. 그거라도 사긴 했지만 이태리에서 포장된 제품 크라상을 이 가격에 사다니 억울하고 분하다.


인터넷도 안 되는 숙소, 썰렁한 주변환경, 불편한 교통, 게다가 방은 완전 북향으로 하루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집 안에서도 외투를 걸치고 있어야 한다.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이런 집에 한 달 넘게 살게 되면 어쩔 뻔했어. 답사 오길 천만다행이지.'

하며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아까운 로밍 데이터를 써가며 다시 숙소 검색을 시작한다.


이번엔 돈을 아끼지 말고 가격 보다 장소와 위치를 우선으로 하기로 했다. 필터에 무료 와이파이 먼저 넣고 필요한 기능 - 주방, 전용 욕실, 평점 8점 이상 등을 체크한 후 최저가를 설정하지 않고 지도로 보기를 누른다.


이태리 전국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집들을 하나하나 들어가 본다.


몬페라토? 밀라노 옆이네. 겨울엔 춥지.

오스투니? 장화 뒤꿈치 쪽이네. 교통이 별로야.

이건 150제곱미터 엄청 넓네. 뭐? 사르데냐섬? 안되지.

거의 항상 매진인 숙소 - 절호의 기회예요.

흐음, 끌리는데? 시칠리 남쪽 끝이네. 여기서 한 번 살아봐?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나폴리 시내 지하철역 근처에 있다는 평점 좋은 숙소를 찾았다.

'그래. 나폴리에 있으면서 폼페이, 아말피, 소렌토를 접수하는 거야.'

취소 가능이니 일단 예약부터.


예약 후 리뷰를 꼼꼼히 봤다. 우린 겨울에 묵을 예정이니 겨울 리뷰도 찾아가며.

그러다 한 리뷰를 보니 부엌과 거실을 다른 방과 함께 써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다시 살펴보니 부엌이 공용공간으로 표시돼 있다.

취소, 다시 검색.


아드리아해 쪽 바리의 중앙역 앞에 있는 집이 눈에 띈다. 이딸로 기차가 오는 중앙역에서 5분 이내 거리란다.

그래 교통이 최고지. 이딸로 기차 프로모션할 때 딴 동네 다니고 기회 되면 아드리아해 건너 두브로브니크도 다녀오자.

이런 마음으로 일단 예약을 완료했다.

그전보다 거의 백만 원이 올라갔지만 살 집을 정해놓으니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저녁을 차려먹고 산 위에 예쁘게 불 밝히고 있는 성당으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날은 좀 썰렁하지만 가로등 불빛이 너무나 예쁘다.


내가 본 제일 예쁜 가로등.


20분쯤 완만한 언덕을 올라 성당에 가까이 가니 제대로 된 이태리 마을과 아름다운 골목길, 광장이 나온다. 다시 피우지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이왕 온 거 다시 올 일 있겠어? 마을 구경이나 실컷 하지 뭐.'

하며 이리저리 걷다 보니 멋진 식당도 하나둘이 아니다.

내일 점심 먹을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찜해두고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슈퍼에서 사 온 파우지 생수는 물맛이 최고다! 이태리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피우지 생수를 제공한다고 한다.


샤워물도 너무나 부드럽고 뒤끝이 개운해서 온몸이 보들보들하니 잠자리가 편안하다.


그래 내일은 다시 못 올 피우지를 마음껏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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