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J의 친구 부부들과 1년 전부터 계획했던 유럽 여행을 다녀오게 됐다.
항공권을 끊다보니 하필이면 로마 인아웃 왕복이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일부러 와볼 수 없는 이 먼 곳에 미리 오게 된 것도 운명이다. 이 참에 우리가 살게 될 집의 답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 집에 이틀 정도 미리 묵어보고 숙소가 우리 생각과 다르다면 아예 예약을 취소하고 다른 데로 잡기로 했다. 그럴 일이 없는 게 제일 좋겠지만.
9월에 세 쌍의 부부가 로마에 도착해 지중해 크루즈를 한 후 베네치아, 피렌체 등을 돌아봤다.
친구들과의 여행이 끝나고 예약했던 피우지의 숙소 답사에 나섰다.
그런데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정신없었던 여행 끝 무렵 피우지 숙소로 가는 교통편을 구글맵에서 검색했더니 당일 연결 편이 매우 복잡하다. 내가 처음에 찾아봤을 때는 분명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한 번에 피우지 터미널까지 가는 직행 버스 노선이 있었는데...
구글맵이 가끔씩 뒤통수를 때리면 얼얼하다 못해 정신이 없어진다.
우리가 피우지에 가보려는 날이 토요일, 구글맵에 의하면 버스는 이틀 지나 월요일부터 운행한다고 나온다. 주말이라 운행을 안 하나? 숙소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주말에도 버스가 띄엄띄엄 다니긴 하는데 안되면 택시나 렌터카를 이용하라'는 연락이 왔다. 아니 이런 무책임한 말을 던지다니!
로마에서 피우지까지의 거리는 86km, 택시를 탔다간 교통비만 몇 십만 원 들게 생겼다. 그럴 수는 없지. 온갖 검색을 해서 토요일에 로마 테르미니 역으로부터 피우지 행 버스 6편이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1시 출발 버스를 타기 위해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15분. 피우지 행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을 찾아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피우지? 그게 어디죠?' 피우지란 동네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이름을 알아도 버스가 어디서 출발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다시 열심히 구글과 구글맵을 뒤져 테르미니 역 바깥의 공항버스가 줄지어 서있는 쪽에 버스정류장이 있다는 걸 확인한 시각이 12시 40분.
급하게 가방을 끌고 달려가는데 가도 가도 피우미치노행 공항버스만 줄지어 서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끝까지 가보니 코트랄(Coatral) 버스가 서 있다! 미리 찾아봤던 피우지 행 버스회사 이름이다. 그 앞에 서 있던 점잖은 노신사가 피우지 행이란 걸 다정한 말투로 확인해 준다. 버스표는 저쪽 담배 가게에서 사라는 안내를 덧붙이며.
'그라치에!' 이탈리아 말이 절로 나온다.
이탈리아의 버스표는 타바키라고 하는 담배 가게에서 주로 판매를 한다. 버스 가격이 착하기도 하다. 단돈 5유로.
깔끔하고 쾌적한 2층 버스에 올라 역에서 급하게 산 샌드위치를 먹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마에서 피우지까지 직행버스가 하루에 대여섯 편 있으니 교통은 일단 합격이다. 버스 타고 옆 마을 놀러 가듯 로마도 가고 다른 곳도 갈 수 있지 않은가!
흐뭇한 마음으로 1시간 15분 걸리는 버스에서 차창 밖의 로마 교외 풍경을 즐겼지만 또 다른 난관이 피우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우지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더니 예약해 둔 숙소의 주인 로산나가 현대 모닝차를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닝은 급커브를 돌아가며 꼬불꼬불한 경사길을 계속 올라간다. 피우지는 완전히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언덕길을 올라 외진 골목 끝으로 들어가더니 연립주택 같은 곳에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집 구조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
'괜찮군, 그런데 교통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로산나가 말했다.
"12월에 장기 예약한 사람 맞지? 근데 얼마 전 이 아파트가 팔려서 그 예약을 취소해야겠는데 어쩌지?."
"뭣이라고?" 오 마이 갓. 이런 황당할 데가!
이번에 답사를 오지 않았다면 이탈리아까지 와서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했다.
"당신에게서 아파트를 구입한 새 주인이 우리에게 방을 빌려주면 안 될까?"
"이미 물어봤는데 그 사람들이 직접 들어와서 살 거래.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혹시 동네에 비슷한 집 빌려줄 사람 알아봐 줄 수 있을까?"
"한 번 알아는 볼게"
"그런데 여기 와이파이 비번은 뭐야?"
"와이파이는 없어"
'예약 취소가 되어 도리어 다행이다. 교통도 안 좋은 것 같은데 차라리 잘 됐어. 숙소는 새로 찾아보지 뭐' 나는 J와 귓속말을 나눴다.
지금 상황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달래며 짐을 풀고 동네를 돌아볼 겸 슈퍼에 가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슈퍼는 구글맵에 4시에나 연다고 나온다. 그다음 거리의 슈퍼는 1.2km, 걸어서 16분이다. 거기라도 가야지 싶어 장바구니를 들고 길을 나섰다. 제법 경사진 언덕길을 계속 내려가야 한다.
이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하는 거야?
한숨을 쉬며 걸어가는데 동네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가게도, 사람도, 버스도 보이지 않고 고양이 몇 마리만 길가에 시름없이 앉아 있다.
슈퍼는 중간 규모의 시골 마트로, 웬만한 건 다 있지만 빵이 없다. 이틀 치 장 본 걸 울러매고 걷다가 허름한 카페 비슷한 곳에 들어가서 딱 두 개 남은 크루아상을 샀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다,
하나에 1.2유로, 1800원. 그거라도 사긴 했지만 이탈리아에서 포장된 제품 크라상을 이 가격에 사다니 억울하고 분하다.
인터넷도 안 되는 숙소, 썰렁한 주변환경, 불편한 교통, 게다가 집이 완전 북향으로 하루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집 안에서도 외투를 걸치고 있어야 한다.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이런 집에 한 달 넘게 살게 되면 어쩔 뻔했어. 답사 오길 천만다행이지.'
라며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아까운 로밍 데이터를 써가며 부킹닷컴에 들어가 다시 숙소 검색을 시작했다.
이번엔 돈을 아끼지 않고 가격보다 장소와 위치를 우선으로 하기로 했다. 검색 필터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먼저 기본으로 설정하고 내게 필요한 옵션 - 주방, 전용 욕실, 평점 8점 이상 등을 체크한 후 지도로 보기를 누른다.
이탈리아 전국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집들을 하나하나 들어가 본다.
이탈리아의 겨울철은 관광 비수기다. 다른 계절에 비해 숙소 대여비가 상당히 싸다.
몬페라토? 밀라노 옆이네. 겨울엔 춥지.
오스투니? 장화 뒤꿈치 쪽이네. 교통이 별로야.
오, 이 집은 150제곱미터, 엄청 넓네. 뭐? 사르데냐섬이라고? 그럼 안되지.
바다 뷰가 상당히 좋은 집을 찾았다. '거의 항상 매진인 숙소 - 절호의 기회예요'. 지금 바로 안 잡으면 누군가 채갈 것 같다.
흐음, 끌리는데? 시칠리 남쪽 끝이네. 시칠리 좋지. 여기서 한 번 살아봐?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나폴리 시내 지하철역 근처에 있다는 평점 좋은 숙소를 발견했다.
'그래. 나폴리에 있으면서 폼페이, 아말피, 소렌토까지 접수하는 거야.'
취소 가능이니 일단 예약부터.
예약 후 리뷰를 꼼꼼히 봤다. 우린 겨울에 묵을 예정이므로 겨울철 리뷰도 찾아가며.
그러다 한 리뷰를 보니 부엌과 거실을 다른 객실과 함께 써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앗, 부엌이 공용공간으로 표시돼 있었군. 취소, 다시 검색.
이탈리아를 장화로 생각할 때 뒷굽 쪽인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바리(Bari)에서 썩 괜찮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역에서 5분 이내 거리란다. '그래 교통이 최고지. 게다가 배만 타면 아드리아해 바다 바로 건너편이 크로아티아니까 두브로브니크도 다녀오자.' 그런 마음으로 바리의 숙소 예약을 완료했다.
원래 예약했던 피우지 숙소보다 거의 백만 원이 올라갔지만 살 집을 정해놓으니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저녁을 차려먹고 산 위에 아름답게 불 밝히고 있는 성당까지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날은 좀 썰렁하지만 가로등 불빛이 너무나 예쁘다. 이제까지 내가 본 중에 가장 예쁜 가로등.
20분쯤 완만한 언덕을 올라 성당에 가까이 다가가자 전형적인 이탈리아 마을과 아름다운 골목길, 광장이 나온다. 다시 피우지 마을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이왕 온 거 마을 구경이나 실컷 해두지 뭐.'
이리저리 걸으면서 골목길을 탐색했다. 멋진 식당도 하나둘이 아니다.
내일 점심 먹을만한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찜해두고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마트에서 피우지 생수를 샀다. 이탈리아 역사 속에서도 다양한 치료 효과로 유명한 피우지 생수는 물맛이 최고다! 이탈리아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유명한 산 펠레그레노 생수보다 피우지 생수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샤워물도 너무나 부드럽고 뒤끝이 개운해서 온몸이 보들보들하니 잠자리가 편안하다.
그래 내일은 다시 못 올 피우지를 마음껏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