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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전 답사, 돌고 돌아 결국 다시 피우지

by Bora

피우지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우리가 6주 동안 거주하려던 이 집은 집 구조나 편의시설은 괜찮지만 완전 북향에 반지하라서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세탁기가 있길래 오랜만에 밀린 빨래를 했지만 거의 마르지 않았다.

기온은 15도라는데 음침하고 썰렁하여 집안에서도 점퍼를 입고 있어야 했다.


'날이 참 흐리군' 하면서 대성당 쪽에 찜해둔 식당으로 가기 위에 문을 나서자 세상에!

바깥세상엔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집에서 겨울을 날 뻔했으니.


생각할수록 이 집을 팔아버린 로산나가 고맙고 이번 사전 답사가 천운인 듯 싶다.

한 달 정도 살 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정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장소가 이역만리 이탈리아인데.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 대성당 주변 중심가로 향했다. 성당 앞 광장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활기찬 마을 모습이 펼쳐진다. 극장 앞 고풍스러운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일요일을 맞아 모두들 집을 나선 건가? 어쨌든 아랫동네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런 모습이 바로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의 풍경 아닌가?.

성당에서는 혼배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장미꽃으로 장식한 문을 지나 미사를 살짝 들여다봤다. 소박한 동네 결혼식. 신랑신부와 가까운 이들이 모여 차분하게 미사를 드리는 중이다. 따뜻하고 수수한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성당을 낀 예쁜 골목길을 돌아 어제 찜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막 문을 연 식당은 분위기도 근사하다. 하나둘씩 손님이 들어서더니 금세 자리가 차 버렸다. 일찍 와서 다행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구글 리뷰에서 추천받은 버섯 퐁듀와 과일 샐러드, 생면 파스타를 시켰다. 와인도 두 잔. 클래시코 와인 한 잔에 3유로, 가격도 착하다.


미리 준비해 뒀는지 바로 샐러드와 퐁듀가 나오는데 오오 이 퐁듀 맛이란!

J는 자기 인생 최고의 퐁듀라고 극찬이다. 난 서울 서촌에 있던 스위스 식당의 짜디짠 퐁듀와 절로 비교가 됐다. 버섯 향이 물씬 나며 치즈의 풍미가 감도는 것이 빵에 찍어먹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앞으로 더 이상 피우지 마을에 올 일이 없으니 이 퐁듀를 또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다.


전채 요리를 싹 다 비우고 나니 너무 배가 불러 맛있는 생면 파스타는 다 먹을 수가 없었다.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선 후 커피는 광장에 있는 극장 카페에서 마시기로 했다.

아까 꽉 찼던 인파와 차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광장은 한가롭기만 하다.

카페 벽에 붙어있는 사진이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이 카페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머리 하얀 멋쟁이 주인장이 내려준 카푸치노 맛은 이탈리아 본연의 맛, 게다가 쿠키는 또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한지.


내일 로마로 나가는 교통편이 불안하여 버스 터미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30분쯤 걸었다. 내리막이라 걷기는 힘들지 않은데 다시 숙소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 살짝 겁이 난다.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우회적으로 비난을 해대는 J가 한마디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듣보잡 마을을 찾아낸 거야? 믿고 맡겼더니 도저히 안 되겠네. 이젠 내가 좀 나서야겠어."

그래 마음껏 비난해, 새로 정한 바리의 숙소는 자기가 적극 주장했으니 어디 두고 보자고. 흥!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멋모르고 12월에 그냥 왔더라면 어쩔 뻔했나. 30분을 걷는 동안 도로에는 버스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사전 답사 오길 정말 잘했다. 그냥 멋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예약 취소를 당해도 문제,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도 더 문제였으니.

버스 터미널 앞에는 피우지의 상징인 피우지 온천이 있었다. 공원처럼 넓고 입구부터 멋지다.


터미널 앞의 식당에 가서 버스 시간표를 물어봤다. 문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사진 찍고 확인해 보니 내일 10시 반에 로마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우리 비행기가 3시 출발이니까 시간이 조금 빡빡하지만 그 앞 시간 버스는 새벽 6시 반이라 너무 이르다.


그 유명하다는 피우지 온천에 온 김에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버스 시간에 맞춰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천 입장권을 사면 피우지라고 적힌 종이컵 하나를 준다. 그 컵에다 온천물을 받아마시라는 거다. 산책로는 고즈넉하고 사람들은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다.

온천이라면 목욕을 할 수 있는 원탕도 있겠지?


중세 시대부터 명성이 자자했다는 피우지 온천의 원탕을 찾아 나섰다. 산책로 아래에 근사하게 생긴 건물이 보인다. 저기 있었네 하며 들어갔지만 거기에는 그림이 전시돼 있는 전시장 같은 공간에 마시는 물을 공급하는 곳 밖에 없다.

나중에 로산나에게 물어보니 이 온천은 물을 마시기만 하는 곳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온천탕을 즐기려면 피우지 마을에 산재한 호텔의 스파에 가야 한단다.


숙소에 돌아왔더니 집주인 로산나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제 우리가 부탁했던 대로 다른 숙소를 수소문하여 원래와 비슷한 가격에 해줄 수 있는 집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동남쪽 멀리에 있는 바리로 갈 것인가, 아니면 처음 계획대로 피우지에 머물 것인가 결정을 해야 한다. 바리는 다른 도시로 가려면 일단 로마행 고속 열차를 타고 몇 시간을 이동해야 하지만 피우지는 로마에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으니 더 유리하다. 일단 로마까지 나가기만 하면 다른 도시 다니기도 좋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원래 가격과 동일하게 해 준다니 바리보다 숙박비도 훨씬 싸다. 집 위치만 괜찮다면 피우지가 최선의 선택이다.


일단 로산나가 소개해준 그 집에 가보기로 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5분 만에 로산나가 총알과 같이 나타나 문을 두드린다. 로산나가 새로 찾은 아파트는 버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중심가에 있었다. 집 앞에 필요한 가게들이 골고루 있고 사람들도 적절히 있어 활기찬 동네다. 이 정도 위치면 일단 합격.


제법 큰 주상복합 건물에 내부를 새로 리모델링한 아파트는 부엌이 좀 좁다는 사실만 아쉬울 뿐 그밖에는 나무랄 데가 없다. 2층에 위치한 숙소에는 거실과 침실에 큰 창이 있어 그 창문을 열면 사람들이 오가는 작은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중요한 와이파이는? 한 달 넘게 살면서 인터넷이 안 되면 절대로 안 되지.

현재는 그 방에 모뎀이 없지만 우리가 오기 전에 설치해 줄 수 있다고 한다. 모뎀이 다른 방에 있다고 해서 함께 가서 확인까지 했다. 인터넷 속도 좋고!


그제야 로산나가 변명하듯 말한다.

"우리 집 와이파이도 투숙객이 떨어뜨리는 바람에 모뎀이 고장 나서 인터넷이 안 되는 건데 고칠 수가 없어. 이탈리아에서는 뭐가 한번 고장 나면 고치기가 쉽지가 않아. 고장 접수한 지 한 달이 넘는데 감감무소식이네"

그래서 안 되는 거였군. 몇 달 전 예약할 때는 된다고 나왔던 거고.

"한국은 인터넷 고장 나면 그날로 고쳐주는데"했더니 부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좋아. 이 집으로 결정하자.


이 집의 주인인 클라우디오는 지금 로마에 있단다. 삼자 통화에 AI 통역기를 동원하여 대략의 금액을 협의했다. 갤럭시폰의 AI 통역기는 이탈리아어를 바로 한국어로 바꾸면 거의 외계어 수준이지만 영어로 하면 제법 정확하게 의사소통이 된다.

저녁을 먹으며 클라우디오와 왓츠앱으로 협의하여 처음 5일과 마지막 5일은 부킹닷컴으로, 중간 기간은 나중에 만나서 현금으로 주기로 했다. 40일 숙박에 약 1700유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드디어 인생 퐁듀를 일주일에 한 번씩 먹을 수 있게 됐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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