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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탈리아에서 겨울나기

우리가 살 집

by Bora

우리가 앞으로 6주 동안 살게 될 숙소는 기가 막힌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아랫마을인 피우지 폰테는 버스 터미널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호텔과 상점들이 모인 피우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폰테'는 분수라는 뜻이다. 마을 곳곳에 분수가 솟아오르고 장 한켠에 우리의 숙소가 있다.


집의 구조가 마음에 든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숙소를 경험했고, 이보다 쾌적한 곳에서도 묵어봤지만 거주공간으로 이 정도면 합격이다.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고 거실의 식탁도 크기가 적당하다.


특히 수납공간과 선반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캐리어 세 개 속에 가득 차 있던 짐을 넣어놓고 나니 금세 우리 집이 되어 버렸다. 부엌이 심하게 좁지만 옹색한 대로 빈 캐리어를 보조 선반 대용으로 놓으니 그럭저럭 쓸 만하다. 어차피 조리에는 큰 관심이 없는 날라리 주부라 별 문제없다. 그러면서 먹거리 타령만 하는 건 뭐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전망이 좋다는 점이다. 나는 어디서든 전망을 가장 중요시한다.

"나는 죄짓곤 못 살 것 같아. 형무소에 들어가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데 그런 곳에서 나는 아마 며칠도 못 버티고 돌아버릴 거야."

언젠가 내가 J에게 한 말이다.

이 집은 수령 수백 년은 돼 보이는 우람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광장 앞의 주상 복합 건물 2층에 자리 잡아 창문을 열면 광장과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우리 방 창문 바로 앞에 크리스마스트리 조명도 있고 광장 중앙에는 커다란 곰돌이가 밤새 반짝이며 거리를 밝혀준다. 곰돌이는 얼굴도 참 잘 생겼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반짝이는 곰돌이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머무르다 가는 모습을 내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집이 춥다.

우리처럼 온돌이, 바닥 난방이 존재하지 않는 유럽 주택의 겨울이 추운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식당에 들어가도 온기가 없고 숙소에 들어와도 온기가 없으니 한기가 가시지를 않는다.

물론 호텔처럼 중앙난방이 가동되는 곳은 괜찮겠지만 호텔방에서만 6주를 살 수는 없으니.


한국에서 확인했던 피우지의 겨울 평균 기온은 최고 8도, 최저 영하 2도였다. 그냥 한국의 겨울을 생각하고 외출 복장만 신경 써서 챙겨 왔는데 방에 난방이라고는 거실과 침실 창가에 붙어있는 납작한 전기 라디에이터 2개뿐이다. 그걸로는 집 안에 온기가 퍼지질 않는다. 외출했다 들어와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외투를 벗을 수가 없다.


그나마 창가에 가서 따끈하게 달궈진 대리석 선반에 손을 얹고 예쁜 곰돌이가 지키고 있는 광장을 바라보자면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지만 창가에 몸을 붙이고 살 수는 없지 않나.


J집안을 뒤져 두 개의 난방기를 찾아왔다. 첫 번째 건 찬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다. 탈락. 두 번째 건 크기는 작지만 온풍이 따스하게 나온다. 다행이다!


그런데 채 3분도 가기 전에 온풍기가 꺼져버렸다. 어느 콘센트에 꽂아도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인터넷도 끊어졌다! 모든 벽의 전원이 차단돼 라디에이터도 꺼져버렸다.

두꺼비집을 찾아 내려간 전원을 올렸다. 그제야 다시 와이파이가 잡히고 온풍기도 켜진다. 하지만 겁나서 다시 틀 수가 있나.


집주인 클라우디오에게 하소연했다.

집이 추워.

클라우디오의 설명이 돌아왔다.

"그 집 총 전력량이 4킬로와트인데 침실과 거실에 있는 라디에이터가 각각 2킬로와트야. 만약 히터를 쓰고 싶으면 라디에이터 하나는 꺼야 해.

부엌 인덕션을 쓸 때도 라디에이터 하나는 끄고 써야 전기가 끊어지지 않아."


이런.

이 납작한 라디에이터 두 개가 이탈리아 겨울나기의 유이한 동반자라니.

'따뜻한 동남아 놔두고 왜 추운 유럽을!' 하고 중얼거리는 J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하다.

도시가스 보일러가 집 안 전체를 데워주는 우리나라가 그저 그리울 뿐이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허위허위 찾아왔나 싶지만 그래도 아직은 후회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다행히 수면양말도 챙겨 왔고 내복도 넉넉하다. 이어지는 북유럽 오로라 여행을 위해 두터운 노르웨이 내복까지 가져왔다.


게다가 다행히 유단포가 있다! 일본식 양철통이 아니라 몇 년 전 독일에서 샀던 실리콘제이다. 보온물통에 끓는 물을 넣으면 침대 속에서 밤새 따스하게 몸을 데워준다.

낮에는 아쉬우면 라디에이터에 몸을 붙이고 밤에는 유단포에 의지하며 견뎌봐야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익숙한 기시감이 몰려온다.

마흔 무렵 우리는 아이엠에프 여파로 삼청동 낡은 단독주택서 전세 살이를 했었다. 그 집이 바로 바닥 난방이, 보일러가 없는 집이었다. 안방에만 전기장판을 깔고 살았는데 새벽에 화장실을 가자면 얼마나 추웠던지. 아침마다 침대 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웠던 썰렁한 그 집 거실과 부엌이 떠오른다. 그래도 여기는 영하 10도의 차디찬 추위는 없으니 양반인 셈이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추웠지만 젊었던 시절을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리며 이탈리아의 겨울을 즐겨야겠다.


피터 메일도 그의 책 첫 장을 프로방스의 겨울 칼바람으로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의 겨울바람, '보라'라는 나의 이름이 탈이 된 건가.


그래도 하루 자고 나니 생각보다 괜찮다. 밤에는 침실에 두 난방기를 모으고, 낮에는 거실에 옮겨주며 적응을 해본다. 다행히 요즘 기온은 낮이면 12도, 13도까지 올라 냉기가 거의 없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면 어떨지 겁나기보다 기대가 된다. 아무려면 삼청동 냉골만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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