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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피우지 탐색

동네 슈퍼와 피우지 목요시장

by Bora

이탈리아 살기 첫 주는 주변 탐색, 동네 탐색을 주로 하기로 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

어제 미처 사지 못한 식재료 구입을 위해 산책도 할 겸 또 다른 마트를 찾아 숙소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코옵(CO-OP)까지 가보기로 했다. 코옵은 유럽 각 나라마다 있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다. 아무래도 일반 슈퍼보단 좀 낫지 않을까?

코옵 길 건너편에 China라는 간판을 단 마트가 있는 것을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봤다. 거기도 가보려고 한다. 이름으로 봐서 아시아 마켓이니 한식 재료도 있을 테고, 그밖에 또 뭐가 있나 미리 봐두면 좋을 것이다.


오늘은 첫날보다 기온도 따스하고 공기도 청명하다. 길가의 가게들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규모가 꽤 큰 코옵은 모든 식재료가 신선하고 넉넉하다. 첫날 부실한 시그마 마트에서 100유로어치나 폭풍 쇼핑한 게 아쉽긴 하지만 아직도 많은 날이 남았으니 큰 걱정 안 하고 못 샀던 식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코옵에서 나와 아시아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길 건너편의 '차이나' 간판이 붙은 가게로 갔다. 가 보니 아시아 마트가 아니라 중국인이 운영하는 다이소 같은 잡화점이었다. 로마 시내에 중국사람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이 많은 건 알고 있지만 이런 동네에까지 와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다니 새삼 중국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이소와는 가격도 종류도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웬만한 건 거의 다 구비해 놓았다. 집에 와인잔이 없어서 물컵으로 와인을 마시던 처지라 적당한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와인잔까지 구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구비된 내 집이 된 건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에우로스핀(Eurospin)이란 이름의 또 다른 마트를 발견했다. 커다란 주차장에다 내부규모도 다른 마트보다 훨씬 크다. 토마토를 비롯한 야채 코너 상품이 다양하고, 해물도 이런저런 종류가 많이 진열되어 있다.


이탈리아 마트의 특징 중 하나는 의외로 한국에 비해 해물의 종류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해물은 값도 비싸다. 마트에서 팔리는 모든 해물은 거의 다 꽁꽁 얼린 냉동식품이라서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는다. 싱싱한 조개가 있길래 J에게 자신 있어하는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 의향이 있는지 슬쩍 떠봤으나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 그러시든가. 앞으로 파스타 해 먹을 날이야 많으니까... 그러면서 스파게티면은 왜 장바구니에 넣는 거지?


외국에 와서 단기간 여행이 아니라 실제 살기로 했을 때 다른 점 하나.

식재료를 구입하면서 남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또, 그 나라 슈퍼에서 이제까지 내가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 볼 마음이 생긴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또 사고, 마음에 안 들면 다음부터 안 사면 되니까.


에우로스핀에서 전날 구입하지 못한 발사믹도 샀다. 오기 전에 이탈리아 식재료 쇼핑 리스트를 짜며 공부를 좀 했었다. 발사믹 식초도 종류가 엄청나다. 와인처럼 오래된 것일수록 비싸며, 루치아나 파바로티의 고향으로 유명한 모데나 산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사실 판매되는 발사믹 식초의 원액은 무조건 모데나 산이라고)

년 전 서울에서 제대로 만든 발사믹과 올리브 오일을 선물 받아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식재료를 살 때 값을 따지지 않고 좋은 걸로 사서 맛을 음미해 보기로 했다.


피우지 도착 사흘째, 목요일을 맞아 피우지 장이 섰다. 피우지 전통 시장은 7일장 중 목요시장이다. 장이 서는 장소는 산 위 마을, 시청이 있는 피우지 시타 지역이다.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분도 안 걸려 도착했다. 버스요금은 1유로. 버스에는 우리 포함 고작 3명의 승객뿐이다.

텅 빈 버스 속에서 J는 "겨울철 시장에 뭐가 있겠어? 아예 시장이 안 열릴지도 몰라"라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지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살자고.


종점에 내리니 맞은편 먼 산 꼭대기에 하얀 모자를 쓴 듯 눈이 덮여있다. 날씨는 따사로워도 계절은 분명 겨울이다.


길 아래쪽 도로 한편에 트럭과 천막을 친 옷가게들이 보인다.

애걔걔, 겨우 트럭 몇 대 모인 거야?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천막 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길을 따라 들어가자 옷가게들이 도로를 따라 끝 간 데 없이 이어진다. 주로 의류, 신발, 속옷, 테이블보 등의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한 300미터는 늘어선 것 같다. 5유로, 10유로짜리 싸구려 물건들이지만 제법 다양하다.

옷가게의 행렬은 시청사 앞까지 이어졌다. 빨간색 란제리가 시청사 앞에 진열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교황이 수시로 들렀던 이런 보수적인 동네의 성당 광장에 시청사를 배경으로 빨간 란제리라니! 얼마 전 방영됐던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이 같은 란제리를 팔던 주인공이 생각났다.


아래쪽 도로는 먹거리 장터 차지다. 야채, 과일, 생선과 해물, 치즈와 견과물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있다. 물건을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다들 얼마나 유쾌하고 친절한지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크리스마스 장식의 꼬마 나무도 하나만 사면 집안이 풍성해지겠다.


사람들이 줄 서서 구입하는 올리브 절임을 하나 맛보기로 달라고 했다.

오오, 맛이 깊고 오묘하다. 이 가게에서 올리브와 생모짜렐라, 프로슈터와 피스타치오를 샀다. 멋쟁이 총각이 계산하면서 1유로를 살짝 깎아준다. 신선한 상추와 못난이 토마토, 당근까지 에코백에 넣어 묵직해졌다.


사방에서 이탈리아어만 들리는 와중에 누가 영어로 아는 척을 한다.

"어디서 왔니? 난 미국에서 왔어.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남편이 이탈리아 사람이라 여기 살아. 아, 피우지 폰테에 있어? 나는 여기와 피우지 폰테 사이 언덕바지에 살아. 루이지애나는 평지인데 여긴 완전 언덕이지. 한 달 넘게 산다고? 다음 장날 또 볼 수 있겠네. 반가워."

미국 아줌마도 여기에서는 우리와 같은 이방인. 외지인에게 동류의식을 느끼나 보다.

사람 구경에, 따뜻한 인심에, 아무렇게나 입어도 멋진 이탈리아 아저씨들 구경까지 몇 바퀴를 돌아도 지루하지 않다.


트럭들이 진을 친 시장에서는 아랫마을 피우지 폰테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을 위로 물안개가 자욱한 게 구름 위에서 인간 세상을 보는 것만 같다. 산 위에서 둘러보면 중턱에서 꼭대기까지 집들이 제법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 높은 산동네까지 허위허위 걸어서 올라와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 목요시장은 매주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 주는 장터이자 동네 사람들이 만나 마음과 소식을 주고받는 소중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네 오일장처럼.

우리도 여기 사는 동안 목요일은 피우지 시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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