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 이탈리아의 일상

겨울밤의 정전

by Bora

오밤중에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이 집은 거실에 하나, 침실에 하나, 단 두 개의 2Kw 전기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한다. 그걸로는 너무 추워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찾던 J가 옷장 안에서 중국제 전기 히터를 하나 발견했다. 그러나 온풍 히터를 켠 지 1분 만에 차단기가 내려갔다. 다행히 차단기를 올렸더니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아, 전열기를 추가로 쓰면 안 되는군.'


집주인 클라우디오에게 집이 춥다고 하소연했을 때 클라우디오도 경고를 했었다. 다른 전열기를 쓸 때는 주의해야 한다고.

그렇게 경고를 받았으면 기본으로 설치된 라디에이터 두 개로 그럭저럭 견딜 것이지 히터를 자꾸 켜더니, 동시에 2KW 전열기 세 개를 동시에 사용했다가 용량 초과로 집 전기가 나간 것이다.

내려간 차단기를 올리려고 두꺼비집을 열었는데, 차단기가 내려가지 않았다.

'어? 차단기가 그대로네?'


'아니 이거 뭐야. 정전인가?' 창문을 열어보니 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 조명도 그대로고 다른 집은 전기가 나가지 않았다.

‘큰일 났다!’ 졸지에 암흑세계가 돼 버렸다.

인터넷도 끊기고 온수 보일러도 안되니 더운 물도 쓸 수 없다. 한밤중에 우리 잘못으로 문제가 생겼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고 짜증이 난다.


“옷을 두툼하게 입고 히터는 그만 좀 쓰라니까 쯧쯧”

전기 나가지 않게 조심하라고 내가 잔소리를 할 때마다 J는 차단기 올리면 그만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암흑 속에 옷을 껴입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전기 나가기 전 내가 유단포에 끓는 물 채워놔서 다행이야"라는 J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다. 분명 해맑게 웃는 얼굴일 것이다.

으이그, 사고뭉치.


밤새 시린 발 끝을 유단포에 대고 (다행이긴 하네) 잠을 설쳤다.

유럽의 많은 집들이 그렇든 이 집의 모든 편의시설은 전기제품이다. 전등 말고도 온수 보일러, 인덕션, 냉장고, 전자레인지, 주전자, 헤어드라이어, 세탁기까지.

서울에서 가져온 냉장고 냉동실의 만두도 걱정이다. 이미 한 번 녹았다 얼린 건데 고치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어쩌지? 이탈리아는 단순한 와이파이 고장 수리도 몇 달씩 걸리는 곳인데, 이런 전기 고장은 어디를 고쳐야 하나? 우리가 고장 냈다고 수리비 물어내라고 하는 거 아냐?


J는 자다가 일어나 후레시를 들고 1층부터 복도를 훑어봤지만 메인 배전반을 찾을 수가 없다. 집 두꺼비집의 차단기를 아무리 만져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더 이상 해 볼 것도 없다. 그런데 내일은 일요일이다. 아침이 되더라도 이탈리아에서 일요일에 전기기술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침 7시가 되어 왓츠앱으로 집주인 클라우디오에게 고백을 했다. 밤에 추워서 온풍 히터를 켜면서 라디에이터 하나를 끄지 않아서 총 6KW 와트 전력을 사용하다가... 블라블라...


"그 집 허용전력이 4KW야. 절대 4KW 넘으면 안 돼. 내가 로마 공항 근처에 있는데 오전 중에 그리로 가 볼게. 앞으로는 히터를 켤 때 다른 전열기는 꼭 꺼야 돼."


인덕션, 전기주전자, 전자레인지나 헤어드라이어를 쓸 때도 두 개의 라디에이터 중 하나는 미리 꺼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군.


두툼한 파카를 입은 채 헤드 랜턴을 켜고 J가 아침을 준비한다.


아침을 먹은 후에도 코끝까지 시림이 올라와 차라리 파카를 입고 해가 드는 거리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집주인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서 처음으로 클라우디오를 만났다. 활기찬 30대의 남자다. 우리가 묵는 집은 부모님 소유인데 자기가 관리를 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를 지하주차장으로 데리고 가서 통제실 안에 있는 건물 전체 배전반을 보여줬다. 백개도 넘는 배전반이 벽에 줄지어 늘어져 있다. 우리 집 번호는 1층 10호.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다. 차단기를 올리고 방에 와 봤더니 전기가 들어와 있다. 이렇게 쉬운 걸 몰랐다니! 겨울 하룻밤의 해프닝은 그렇게 끝났다.


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그날 새벽에 아들로부터 카톡이 왔다.

"거기서 오래 있을 거면 직구 하나 해줄 수 있어? 독일에서 마이크를 직구하려고 하는데 유럽으로 배송하면 30만 원 싸다네"

오디오 엔지니어인 아들은 수시로 음향 제품을 구입하는데 30만 원 아끼려고 유럽 있는 부모에게 택배 수령을 부탁하다니 기특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여기 있는 동안 아파트 건물에서 택배 물품을 본 적이 없다. 하얀 대리석이 깔린 복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 배달된 편지 봉투들만이 가끔씩 눈에 띌 뿐이다. 복도식인 이 아파트 현관문에는 호수도 쓰여 있지 않으니 직접 가정으로 배달하는 것도 아닐 테고 택배를 어떻게 받지? 이탈리아에 오고 난 후 거리에서 택배 차량을 본 적도 없다.


이탈리아 택배에 대해 검색 시작.

결론은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택배가 없다! (사악한 요금의 DHL은 별도로 하고)

우체국 택배가 있기는 한데 분실 사고도 많고, 세금이 별도로 추가되며, 우체국까지 직접 찾아가서 택배 금액에다 이런저런 수수료까지 추가로 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배송조회 서비스가 없어서 택배가 도대체 언제 도착할 것인지 기약이 없다는 거다.

클라우디오에게도 왓츠앱으로 물어봤다. 수집소-포인트 센터가 따로 있어 그리로 택배를 보내면 받을 수는 있다고 한다. 그리로 배달은 가능한가 보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없지.


몇 년 전 영국에서 가장 평점 낮은 우편 및 택배 시스템이 국영 로열 메일이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로열 메일로 친구에게 물건을 보내고 나서 다음 주에 그 친구 집에 들렀더니 지난주에 보낸 물건은 계속 오는 중이었다는 말을 듣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다니!’ 하며 웃었는데 이탈리아 택배도 딱 그 수준인가 보다.


"안 되겠어. 이탈리아로 택배 보내는 건."

이탈리아 택배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화면 캡처해서 보내줘도 자꾸 딴소리다.

"독일에서 주문하는 건데 독일이든 이탈리아든 배송비가 공짜거든."

대체 요즘 애들은 왜 글을 안 읽지?

"우리가 있는 건 앞으로도 한 달 넘는데 이탈리아 배송이 최악이래. 위의 글 읽어보라고. 배송비 문제가 아니라 분실, 세금 폭탄이 문제."

"로마에는 낙원상가 같은 거 없나?"

음향 엔지니어 아드님이 유럽도 한국 같은 줄 아나보다.


택배에 관한 한 전 세계 최고의 서비스가 우리나라 아닐까?

나는 쿠팡의 새벽 배송이 노동자 과로사 등 문제로 찜찜해서 가능하면 일반 배송하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애용한다. 그래도 정작 아쉬울 땐 쿠팡도 가끔 쓰는데 이번 이탈리아 출발 전날도 갑자기 필요 물품이 생각나 급하게 쿠팡 당일 배송으로 받아왔었다.

한국 밖에 나와서 보면 그 편리성이 아쉽고 그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시간을 다퉈가며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총알 배송이 안 되던 시절에도, 택배가 별로 없던 시절에도, 다 맞춰가며 잘들 살아왔는데.


슈퍼에서는 아직도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내는 이들이 많고, 1센트, 5센트 동전까지 일일이 세어가며 계산을 하는 나라, 이걸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리도 빠르게 발전해 오면서 얻은 게 더 많은 걸까 잃은 게 더 많은 걸까.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일만 하고,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모모는 사람들의 시간을 아껴준다며 기쁨의 시간도 훔쳐버리는 시간 도둑 회색 신사에게 묻는다.

‘그렇게 시간을 모아서 뭐해요?’

‘저축을 하지’


‘시간 부자가 되면요?’

‘더 많은 시간을 모을 수 있지’


시간을 아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해질 것인가.

편안하고 여유로운 여기 사람들을 보며 느림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을 생각해 본다.

keyword